누적 조회 수 5억 뷰 기록을 세운 한국관광공사 홍보 영상의 주인공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의 예술감독 김보람을 만났다. 코로나19로 얼어붙은 공연계에 ‘기가 막힌 흥’을 불어넣은 댄스 팀을 10년 이상 이끌어온 그는 늘 ‘새롭기’보단 ‘발전하는’ 무대를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다.
“나랏돈 제대로 썼네.” 지난해 한국관광공사가 공개한 홍보 영상 <한국의 리듬을 느껴보세요 Feel the Rhythm of Korea>에 대한 네티즌의 평이다. 판소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국악 그룹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에 맞춰 청와대 앞, 창덕궁, 시청 같은 서울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를 무대로 독특하고도 위트 있는 안무를 선보인 영상은 누적 조회 수 5만 뷰의 기록을 세웠다. 이 영상의 중심에는 현대무용 그룹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Ambiguous Dance Company’가 있다. 다소 어렵게 여겨지던 현대무용과 고루하다 생각되던 전통에 이들만의 독창적인 움직임을 더해, 예능 프로그램 속 연예인은 물론 유튜브와 틱톡 같은 온라인 영상 플랫폼을 통해 외국인까지 이들의 춤을 따라 하고 있다. 이에 팀을 이끄는 예술감독이자 안무가 김보람은 2020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한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무용 부문에서 문체부 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이런 인기는 예견된 일이었다.
김보람 감독은 데뷔 때부터 국내 무용계의 스타였다. 2008년 CJ영페스티벌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으며 팀의 이름을 무용계에 알린 것을 시작으로 그 후 유명 대회에서 다수 수상했고, 대표 레퍼토리인 <바디 콘서트>와 <피버>는 해외에 초청될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영어로 ‘애매모호한’이란 뜻을 지닌 팀의 이름처럼 전통과 현대무용, 클래식과 스트리트 댄스 등 서로 이질적인 요소를 엮어낸 독특한 춤사위가 이들을 독보적인 그룹으로 만들었다. 장르를 넘나드는 이들의 무대는 고등학교 시절 무작정 춤을 추고 싶어 엄정화, 이정현, 코요테 등의 백업 댄스를 했던 김보람 예술감독의 이력과 관계가 깊다. 방송 댄스를 추면서도 대학에서는 현대무용을 전공하고 국립현대무용단에 속하기도 했던 그는 다양한 장르의 춤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15년 넘게 팀을 이끌면서 변하지 않은 건 연습을 좋아한다는 거예요. 각 장르의 춤을 전공자만큼 공부해야만 흉내를 냈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죠.”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건물로 유명한 원서동의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만난 김보람 감독은 한국을 대표하는 댄스 팀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비결을 덤덤하게 말했다. 서울, 춘천, 부산 등 전국 각지에서 공연을 열고 지난해 11월에 열린 2020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참가와, 피자 알볼로·아이폰같은 브랜드 광고 영상 촬영 등으로 2020년을 바쁘게 달려온 그는 겨울바람이 매섭게 부는 이른 아침에도 카메라 앞에서 연신 몸을 움직였다. 12월 중순부터 한 달간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다는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코로나19로 2020년은 공연계가 고전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는 활발하게 활동을 해왔는데요. 이런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고 있나요?
벌써 코로나19가 1년이 다 되어가기에 공연계도 어느 정도 적응을 한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열린 2020 서울국제공연예술제도 온라인으로 개최되었고요.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도 3월부터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로 공연을 올리고 있죠. 하지만 공연 실황을 그대로 영상에 담아 보여주는 방식은 관객의 집중도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기에 하나의 미디어 매체로 즐길 만한 공연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30초짜리 광고에서도 전 세계의 풍경이 모두 보이는 영상들이 쏟아지는 와중에 깜깜한 극장에서 무용수들의 동작을 보는 건 지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화재가 된 한국관광공사 홍보 영상 시리즈부터 최근의 광고까지,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는 무대 공연뿐만 아니라 영상 작업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작업할 때 어떤 부분이 다를까요?
공연은 1시간 동안 치르는 실제 전쟁 같다면, 영상 작업은 게임 속에서 하는 전쟁 같죠. 무대 위에서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이 안 되지만 영상은 다시 한번 촬영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무대 공연을 준비할 땐 모든 것을 갖추고 들어가는 반면에 영상을 찍을 땐 현장에서 조율하며 다른 길을 모색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보면 영상 작업이 더 수월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함께 일하는 스태프도 더 많고 장소도 공연에 최적화된 무대가 아니기에 변수가 많은 편이에요. 한국관광공사 홍보 영상만 보아도 알겠지만 거리에서 춤을 춘다는 게 쉽지만은 않죠.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는 거리 공연에 특화되어 있는 것 같아요. 한국 관광공사 홍보 영상에서도 부산 감천문화마을이나 목포의 염전처럼 몸동작을 자유롭게 펼치지 못하는 공간에서 그와 어우러지는 동작을 보여주었고요.
5년 전부터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는 길거리 공연을 해왔어요. 무용수들은 햇빛 아래서 관객의 눈빛을 가까이 마주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주 벌거벗겨진 기분이 들죠. 저는 그 부분이 무용수를 단련시키고 표현력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훈련의 일환으로 진행했어요. 이와 연결되어 2016년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한 ‘신나는 예술 여행’에 참여해 전국의 KTX 역사에서 공연을 했죠. 역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목적은 빨리 기차를 타고 떠나는 거였기 때문에 관객들을 붙잡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대합실이나 플랫폼에서 무대를 꾸며 간신히 공연을 하고 나서 너무 힘들어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노약자 전용이라고 못 타게 한 적도 있어요. 힘들게 공연을 했는데 돌아오는 반응이 호통이었으니 한 무용수는 울기도 했죠.
그런 경험들이 쌓여서 이번 한국관광공사 홍보 영상이 잘 완성된 것 같아요. 5편의 영상이 나왔는데 그중 가장 만족스러운 것은 무엇인가요?
정말 춤추기 좋은 곳에서 공연을 올리더라도 100% 만족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 어느 하나를 꼽는 건 어렵죠. 대신 가장 고생스럽던 촬영이 기억에 남습니다. 힘든 것도 우위를 가릴 순 없지만(웃음) 그중에서도 목포 항구에서 촬영하던 때가 아직도 생각나요. 새벽 5시에 한창 그물을 거두는 어부들 앞에서 춤을 췄는데, 삭힌 홍어밭에 들어온 듯 악취가 엄청나더라고요. 보통 한 장소에서 10~15분 정도 춤을 추는데 냄새가 사람을 그렇게 빠르게 지치게 한다는 걸 그때 알게 되었어요. 그런 고생들이 다 자양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온라인으로 진행한 2020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서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의 대표 레퍼토리인 ‘기가 막힌 흥’을 공연했다. © Sang Hoon Ok
힙합, 팝송, 발라드, 일렉트로닉 음악 등에 맞춰 안무를 구성한 공연 <바디 콘서트>의 한 장면. © Sebastian Marcovici
2019년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올린 공연 <피버>. 색동 저고리를 재해석한 의상은 댄스 팀의 시그너처로 자리 잡았다. © 서울거리예술축제 2019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의 춤은 공간과 어우러지는 춤일 뿐만 아니라 현대무용을 기반으로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인상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대표 공연인 <바디 콘서트>에서는 힙합 음악에 전통 춤 동작을, 팝음악에 발레를 접목했습니다. 안무를 어떤 방식으로 구상하나요?
사람들이 영화를 볼 때 한 장르만 고집해서 보지 않잖아요. 다양한 장르를 본다고 해서 장르 구분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요. 이제는 제 생활이 된 춤에서도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보고 흥미로운 부분에 아이디어를 얻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신 아이디어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충분한 연습량과 공부가 뒷받침되어야 하죠. 무엇 보다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는 움직임을 통해 창작을 하는 팀이기에 장르는 벽에 불과해요. 춤 같은 공연 예술뿐만 아니라 영화, 드라마, 그림, 일상에 펼쳐지는 에피소드까지 창작자에게는 모든 게 영감이 됩니다. 오늘 이 인터뷰도 제게는 영감을 줄 수 있겠죠?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와 안무가 김보람에게 붙는 수식어는 ‘독창적이고 새롭다’입니다. 팀을 15년 이상 유지하면서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나요?
저는 춤을 노동을 기반으로 한 예술이라고 생각하고, ‘삽질’도 의미가 있다고 말해요. 불필요한 일에 힘을 쓸 때 흔히 “삽질한다”고 말하는데, 땅을 파면 구멍이라도 생기죠.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는 여기에 집중해 남들보다 오래, 깊게 삽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제는 새로운 게 있을까 싶어요. 신형 스마트폰이 나오면 새롭다고 광고하지만 사실 10년 전 나온 원형에서 틀이 바뀐 게 아니라 한층 발전한 거죠. 공연도 새로운 것에 주목하기보단 발전한 부분을 봐주면 좋겠어요. 그런 관점에서 접근하면 무대를 더 즐길 수 있을 겁니다.
현대무용이 많은 대중에게 이렇게 주목받는 건 처음 있는 일 같아요. 다음 레퍼토리나 프로젝트에 대한 기대도 큽니다.
부담도 많이 느끼고, 앞으로 우리 팀이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나 고민도 많이 해요. 하지만 본래 제가 하고 싶은 걸 우선하는 성격이라,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차근차근 할 것 같습니다. 그중 하나가 지난여름 시험해본 ‘귀코 프로젝트’입니다. 10명의 무용수가 각자 서울의 한 장소를 선택해 40분 동안 동일한 안무를 추는 영상을 페이스북 라이브로 스트리밍하는 거죠.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필요한 시기이기에 관객이 모이면 안 되어, 무용수들이 마스크를 쓴 채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춤을 췄어요. 관객들은 집에서 스마트폰이나 PC로 10명의 영상을 음악과 함께 관람할 수 있었죠. 이걸 좀 더 구체화해서 이번 겨울에 ‘줌’을 통해 선보일 예정입니다. 안무 이름은 ‘비타민 댄스’로, 전 지구인의 국민 체조를 목표 삼아 우선 튜토리얼 영상을 유튜브에 공개했어요. 지금은 온라인에서 만나지만 코로나19가 끝나면 시청광장 같은 곳에서 다 같이 만나 춤을 추고 싶습니다. 현대무용을 대중화시키겠다는 식의 목표를 둔 게 아니에요. 긴 시간 작업을 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춤이 있단 생각이 들었어요. “춤추듯 살아라.”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11분>에 나오는 문구처럼 저와 같이 많은 사람이 춤추듯 살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어떤 안무가로 기억에 남고 싶나요?
저 개인보다는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가 좀더 단단한 단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국공립 무용단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안무 팀은 단기적인 프로젝트나 수익성이 적은 활동을 하기에 무용가들이 이를 직업 삼기 어려운 상황이죠.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에도 10년 이상 함께한 사람은 장경민 무용수 1명이고, 나머지는 5년, 3년, 몇 개월 된 친구들이 섞여 있어요. 수입이 일정치 않아 팀에 오고 나가기를 자유롭게 하도록 했어요. 매년 수백 명의 무용수가 대학을 졸업하는데, 이들이 우리 단체에 입사하듯 들어와 안정적으로 춤을 출 수 있는 울타리가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당신에게 ‘럭셔리’란 무엇인가요?
반 고흐의 그림을 보면서 “촌스럽다, 구식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이처럼 시간이 지나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가치가 럭셔리라고 생각합니다.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가 지향하는 안무도 시대와 상관없이 존재하고 감동을 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