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도 인류세적 사건의 하나
요즘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마비되었다. 학교와 회사, 공장, 가게가 문을 닫았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입과 코도 마스크로 닫아놓았다. 행여 기침 소리가 들리면 덜컥 간이 내려앉는다. 숨쉬기가 겁나고 사람을 만나기가 두려운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미 지난 3월에 세계보건기구는 팬데믹을 선언했다. 대재앙 시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재난 지원금을 지급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일상이 마비되어버렸다.
우리는 언제 감염의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언제 팬데믹이 과거의 일이 될 수 있을까? 우리에게 미래가 있을까? 아니, 인류에게 미래가 있을까?
물론 지금 아무리 위세가 대단해도 코로나19는 언젠가는 종식될 것이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코로나19를 가지고 인류의 종말을 운운하는 필자가 너무나 호들갑을 떠는 것은 아닐까?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필자의 우려가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우는 하늘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황당한 걱정으로 밤잠을 자지 못하던 중국 기나라 사람에게서 유래한 말이다. 그런데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진짜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지도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다. 21세기에 기우의 주체는 기나라가 아니라 지구 전체, 기나라 사람이 아니라 인류 전체가 되었다. 그러한 지구 생태계의 총체적 위기를 가리키는 개념이 인류세人類世이다. 코로나19도 인류세적 사건의 하나이다.
머지않아 인류가 멸망할 수 있다?
문제는 코로나19가 우발적이며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그것은 떼 지어 몰려드는 인류세적 증상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에 발생한 재난을 생각해보자. 올여름에는 우산을 챙기지 않은 날이 없을 만큼 매일 비가 왔다. 최장의 장마였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8월 초에 발생한 산불은 벌써 남한의 20% 면적을 태우고 아직도 맹렬한 기세로 확산되고 있다. 지난해 발생한 호주 산불의 악몽이 채 가시기도 전이다. 그것은 남한보다 넓은 면적과 10억 마리가 넘는 야생동물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바다의 온도와 해수면도 상승하면서 온대 지역이던 우리나라의 기후도 아열대로 바뀌고 있다. 빙하가 녹으면서 물에 잠기는 도시도 늘어나고 있다.
이 모든 재난의 배경에는 지구온난화, 기후변화가 있다. 지구가 불덩이가 되어가고 바다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섬을 이루고 있다. 이미 20세기 중반부터 생태계의 위기를 지적하는 경고음이 끊이지 않았다.
생태학의 어머니라 불리는 레이철 카슨은 1962년에 토양과 자연의 오염을 고발하는 <침묵의 봄>을 출간했다. 1972년에 로마클럽은 각국이 생태계 회복을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인류가 멸망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성장의 한계>를 출판했다. 이러한 책들이 세계에 안겨준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몇 년 후 전 세계 정상들이 모여 기후회의를 개최한 것도 그러한 영향의 하나이다. 그리고 1992년에는 1백54개 나라가 유엔기후변화협약에 서명하고, 5년 후에는 온실가스 감축에 관한 교토의정서를 채택했다. 그러나 지구온난화나 기후변화가 곧 인류세라고 착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사실 인류세라는 신조어를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리고 인류세 이전 시기인 홀로세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지질학적 특징이 없다는 의견도 있다. 아직 시기상조라는 것이다. 이러한 반론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인류세라는 개념은 현재 지구 위기를 진단하고, 인류의 생존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용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행동과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구호이기도 하다.
인류세는 인류가 내는 세금인가?
인류세는 역사적 용어가 아니라 지질학적 용어이다. 지질학은 기후학이나 물리학·생태학과는 다른 학문으로, 인간의 시간대가 아니라 지구 지층의 시간대를 다룬다. 예를 들어 석탄기는 3억 6천만~1억 년 전의 시간대에 걸쳐 있다. 이 시기의 주인공은 양치식물이다. 석탄은 당시 양치식물이 지상을 덮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공룡이 살던 시기가 쥐라기이다. 지층에서 발견되는 공룡 화석이 이를 말해준다. 이러한 천문학적 시간대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시간은 지극히 짧다. 호모사피엔스는 약 5만 년 전에야 출현했기 때문이다. 농업의 시작도 기원전 1만 년이었다. 그럼에도 인간은 놀라운 속도로 문명을 건설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과학 문명의 발달은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일찍이 자연이었던 지구는 인간이 만든 작품으로 변모했다. 쥐라기의 주인공이 공룡이라면 인류세의 주인공은 인간이다.
인류세란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는 시대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문제는 불행히도 그러한 문명이 지구환경을 파괴한 대가로 얻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지나친 인구 증가와 자원 소비, 플라스틱 쓰레기 등이 지구의 균형을 깨뜨린 것이다.
인류세에 남을 화석, 방사선 물질·닭뼈· 플라스틱 쓰레기
인류세는 양가적 의미를 지닌다. 한편으로는 인류가 지구를 정복한 이야기이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인류의 생존이 위기에 처한 이야기이다. 지금까지 지구와 자연은 인간이 마음껏 이용하고 개발해도 고갈되지 않는 무한한 자원으로 생각했다.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지구는 인간의 욕망과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숲을 개간해 농지로 만들고, 땅을 파헤쳐 석탄과 석유를 채취하고, 다이너마이트로 바위산을 폭파하면서도 지구는 눈 하나 깜짝 안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에 대기 중 산소 농도가 40~50%에서 10%로 급감하고, 오존층이 파괴되며, 빙하와 만년설이 녹아내렸다. 인간의 압력을 견디지 못해서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구의 총체적 위기를 진단하고 대응하기 위해 전 세계의 저명한 과학자들이 모여서 인류세 워킹그룹(AWG)을 꾸렸다. 그리고 2016년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구가 새로운 지질시대로 진입했음을 공식 선언했다. 미래에 지층에서 현재 인류의 결정적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방사선 물질과 플라스틱 쓰레기, 닭뼈, 이 세 가지 물질이 이 시대의 강력한 화석 후보로 거명되었다. 과거에 양치식물이 죽어서 석탄을 남겼다.
인류는 자신들이 만들고 소비한 방사선과 플라스틱, 닭뼈 화석으로 인류세를 증언할 것이다. 인간이 지구에 가한 압력이 지층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80억 명이 살아가려면 네 개의 지구가 필요하다
인간이 지구에 가하는 압력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인구의 폭발적 증가이다. 과거에 공룡의 서식지이던 지구에서 현재 78억 명의 인간이 살고 있다. 지구가 얼마나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을까? 아무리 비옥한 토지도 무리하게 곡물을 재배하면 토양이 척박해지고 땅이 유실되며 황폐해진다. 한때 융성하던 마야문명은 인구 증가와 식량 부족으로 신음하다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지구도 버티고 견딜 수 있는 능력의 한계가 있다.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만 붕괴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을 끊임없이 훼손하고 고갈시키면 나중에는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지구 생태계가 악화될 수 있다. 생각해보자. 기원전 1000년 지구 인구 1백만 명, 기원후 1000년 3억 명, 1500년에 5억 명(인류세 19). 기원전 1000년에 지구 인구는 1백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기원 후 1000년에는 3억 명으로 증가하더니 16세기에는 5억 명이 되었다. 19세기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15억 명이었다. 그런데 1975년에 인구가 40억 명으로 치솟더니
현재는 78억 명이다. 인구만 많은 것이 아니다.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우리는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온갖 식품과 상품이 넘쳐나고 있다.
<인구 폭탄>의 저자 폴 얼리크가 세계 적정인구를 계산한 적이 있다. 그는 지구가 견딜 수 있는 최대치가 20억 명이라고 보았다. 현재의 인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구 네 개가 필요한 셈이다
지구의 낭비는 인간의 낭비, 지구의 상처는 인간의 상처
코로나19도 인구 증가와 무관하지 않다. 과거 마야문명이 그러했듯이 많은 인구가 먹고살기 위해서는 자연을 무리하게 개발할 수밖에 없다. 지구의 가슴에서 광물과 석탄, 석유를 채취하고 숲을 밀어 논밭으로 만들어야 한다. 원래 코로나19는 박쥐 몸에 기생하는 바이러스였다. 인간이 박쥐 서식지를 침범하지 않았다면 코로나19는 인간 세상으로 나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인간이 자연에 가한 충격이 인류세라고 했다. 충격이 더욱 심해지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짐작할 수 없다. 아무런 이유 없이 지구 종말에 대한 영화와 좀비 영화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멸종이 임박했다는 불길한 뉴스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지구의 생태계 회복이 가능한지 아닌지, 티핑 포인트가 이미 지났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예비용으로 지구가 하나 더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단 하나뿐인 지구이다. 그래서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인위적으로 인구를 줄일 수도 없다. 정치인에게 지구의 미래를 맡길 수도 없다. 그렇다면 어떠한 해결책이 있을까? 없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외에는 아무런 해결책이 없다. 78억 명의 인구가 20억 명의 인구처럼 소비의 몸집을 줄여야 한다. 소비와 풍요, 번영의 시대는 끝났다.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는 지구를 상품으로 바꿔서 소비하는 역사였다. 이제 인간이 변화할 때이다. 지구와 인간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다. 지구의 낭비는 인간의 낭비이며, 지구의 상처는 인간의 상처이다. 지구가 기침을 하면 인간은 몸살과 독감을 앓는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과거처럼 많이 벌고 많이 먹고 많이 배출하는 삶이 아니라, 이제는 적게 벌고 적게 먹고 적게 배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될 수 있으면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설령 티핑 포인트가 지났더라도 우리는 늦지 않은 듯이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지구를 살리는 혁명을 실천해야 한다.
글을 쓴 김종갑 교수는 미국 루이지애나 주립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건국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몸에 대한 연구와 문화철학에 주된 관심을 가지고 ‘몸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며 다수의 책을 집필했다. 특히 몸문화연구소를 주축으로 <인류세와 에코바디>라는 책을, 건국대 인류세인문학단의 연구진과 함께 <우리는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죽어가고 있다: 인간이 만든 절망의 시대, 인류세>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