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 출신의 영국 작가 하산 하자즈는 자유분방한 작업으로 세상의 수많은 편견을 깨뜨린다. 사진과 영상, 설치를 넘나드는 컬러풀하고 위트 넘치는 작품 속에는 민족과 인종, 자본, 젠더 같은 심오한 주제가 담겨 있다. 삼청동 바라캇 컨템포러리에서 아시아 첫 개인전을 열고 있는 그의 방대한 작업 세계 속으로.
하산 하자즈의 대표작인 ‘나의 록스타’ 시리즈 중 일부. 영국 출신 아티스트 ‘블레이즈Blaize(2013/1434)’와 아프로 브라질리언 댄서 겸 무예가, 곡예가인 ‘라일린Rilene(2013/1434)’.
모로코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를까? 프랑스 식민지였던 나라로 아프리카와 유럽의 교두보 역할을 해온, 다양한 문화가 혼재하는 곳. 거리마다 북아프리카 특유의 화려한 컬러와 패턴이 가득하고, 유럽에서 쏟아져 들어온 명품을 카피한 ‘짝퉁’ 시장이 활발하며, 넉넉지 못한 형편으로 인해 병이나 캔은 물론 장난감, 타이어, 의류 등 온갖 물건을 재활용하는 데 익숙한 나라. 이곳에서 태어나 10대 시절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이주한 아티스트 하산 하자즈Hassan Hajjaj는 명품과 모조품을 뒤섞어 작품 소재로 쓰고, 폐타이어와 통조림 캔으로 프레임을 만드는가 하면, 유명 연예인부터 거리의 예술가까지 다양한 인물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에게 고국의 다양한 이미지는 작업의 중요한 모티프다.
2세대 이민자로 정체성 혼란과 언어 장벽, 인종차별, 경제적 소외 등 수 많은 문제를 겪은 작가는 다양한 인물을 촬영한 초상 사진에 모로코 특유의 강렬하고 리드미컬한 시각 요소를 더해 아랍 문화에 대한 서구의 편견을 꼬집는 작업을 이어왔다. 정규교육을 받는 대신 런던의 길 위에서 음악과 패션, 디자인 등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축적한 그는 1970년대 후반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 RAP를 론칭하고 힙합, 레게 등을 즐길 수 있는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며 영국 내 흑인 대안 문화를 이끌었다. 본격적으로 카메라를 들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 모로코를 여행하며 경험한 북아프리카에 대한 서구의 편견을 깨뜨리기 위해 아프리카인을 중심에 세운 사진, 영상, 퍼포먼스 작업을 펼쳤다.
카메라를 든 하산 하자즈의 모습.
나이키 ‘조던’을 신고 루이 비통 머플러를 두른 채 플라스틱 공병 수거함에 올라서거나 앉아 개성 있는 포즈를 취한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은 주류 문화에 저항하고 고정관념에 맞서는 작가의 분신이다. 히잡을 쓴 여인들이 오토바이에 올라 카메라를 도발적으로 응시하는 ‘케시 엔젤스Kesh Angels’ 연작에서 아랍 문화 속 여성들은 더 이상 비밀스럽고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며,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마라케시와 런던, 파리, 두바이의 거리에서 팝업 사진 스튜디오를 열며 만난 사람을 기록한 ‘나의 록스타My Rockstars’ 연작 속 인물들은 하자즈의 작업 속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경계를 넘나들고 편견을 깨뜨리는 그의 작품들은 LA 카운티 미술관, 빅토리아 & 앨버트, 구겐하임 아부다비, 대영박물관 등 세계적인 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8월 5일부터 9월 27일까지 삼청동 바라캇 컨템포러리에서 아시아 최초로 열리고 있는 하산 하자즈의 개인전 <다가올 것들에 대한 취향A Taste of Things to Come>에서 작가의 방대한 작업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전시장은 깜짝 놀랄 만큼 현란한 색채와 독특한 사진 이미지, 기발한 물건의 향연이다. 모로코의 정지 신호 안내판과 낙타 같은 지역 상징물을 동시대적 감각으로 새롭게 재해석해 전시장 벽면 전체를 뒤덮은 벽지 작업부터 토마토소스병, 통조림 캔, 모로코 전통 모자이크 타일 등으로 꾸민 프레임을 두른 ‘나의 록스타’ 시리즈 등 대표 연작, 아티스트 9명의 연주와 퍼포먼스를 한데 엮은 영상, 작가가 모로코와 영국에서 아트 숍이자 아티스트의 사랑방 개념으로 운영중인 부티크를 재현한 공간 등이 펼쳐진다. 문화의 용광로처럼 수많은 요소를 거침없이 수용하며 무한히 확장해가는 하산 하자즈의 세상을 만날 시간이다.
페인팅을 더한 사진 콜라주 작품 ‘마라키 & 도브Marakchi & Dove(HPP)(2000/1421)’.
모로코의 전통적인 모자이크와 타일을 모티프로 제작한 프레임과 사진의 조화가 강렬한 ‘나의 록스타’ 시리즈 중 ‘누어 에딘 틸사가니Nour Eddine Tilsaghani(2016/1437)’.
<다가올 것들에 대한 취향>은 아시아에서의 첫 개인전이다. 한국에서 작품을 선보이게 된 소감이 궁금하다.
바라캇 컨템포러리와 지난 2년 여간 전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개인전을 열기로 한 올해 코로나19가 심각해지면서 모든 것이 정지돼 당혹스러웠는데 갤러리에서 전시를 그대로 열겠다는 소식을 전해와 굉장히 놀랐다. 이 어려운 시기에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서로 만나지 못한 채 전시를 준비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결과를 이뤄내 기쁘다. 어려운 상황을 잊고 건설적으로 작업에 임할 수 있어 즐거웠다.
작품 속에 항상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작업의 주제에 맞는 인물을 선정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있다면?
열정이 넘치고 추진력이 강한 이들에게 매력을 느낀다. 사전에 기준을 정해둔 건 아니지만 작업을 하다 보니 내 작품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인물이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어떤 위기가 찾아오거나 장애물이 생긴다 해도 그들의 열정을 막지 못할 것이다. 이런 점이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그들의 모습을 통해 많은 이가 용기를 얻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해왔다.
인물들의 패션이 하나같이 굉장히 화려하다. 루이 비통, 디올 같은 럭셔리 패션 아이템부터 스트리트 패션 아이템까지 다양한 것들이 담겨 있는데, 작업할 때 패션 디렉팅은 직접 하는 편인가?
내 작업 과정은 협업을 기반으로 하기에 작품 속 인물들이 스스로 편안하게 느끼는 것을 중요시한다. 인물들이 입은 옷 대부분은 내가 시장에서 찾은 옷감을 이용해 모로코의 재단사가 만든 것이다. 내가 성장하는 동안 패션 브랜드도 굉장히 다양하고 많아졌지만 나와 같은 처지에 있던 사람들은 브랜드 옷을 살 여유가 없었고, 그 옷들 역시 우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가짜 천을 이용해 옷을 만들었는데, 우리에게 어울리는 옷을 만든다는 점에서 재미있고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최근 몇 년 동안 대퍼 댄Dapper Dan, 버질 아블로Virgil Abloh 같은 디자이너들이 주류 패션계에서 받아들여지고, 더 넓은 범위의 고객을 위한 옷을 만드는걸 보면 참 행복하다.
바라캇 컨템포러리 전시 전경. 작품이 걸린 벽의 컬러 조합까지 작가가 세심하게 구성했다.
모로코와 런던에서 작가가 운영 중인 부티크를 재현한 전시 공간.
장르 구분 없이 여러 과정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하나의 큰 맥락을 이루는 작업은 요즘 아트 신의 트렌드로 여겨지는데, 오래전부터 이런 작업을 꾸준히 이어온 점이 놀랍다. 경계 없이 자유분방하게 작업을 펼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아마도 서로 다른 두 나라에서 자라서인 듯하다. 런던에 살면 다른 국가, 대륙, 문화권에서 온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그 다양성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또 개인적으로 무언가에 특정하게 국한되는 것이 불편하고 고정관념 속에 갇히고 싶지 않은 성향이 강하기도 하다.
아티스트로서 진행 중인 다양한 작업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우리는 누구든 될 수 있는 자유가 있고,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며, 우리에게 더 잘 맞는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낙관론을 전하고자 한다. 내 작품은 모두를 위한 것이지 오직 예술계를 위한 것이 아니다.
요새는 어떤 작업을 하고 있나?
한 가지 작업에 집중하지 않는 편이라 최근에도 다른 몇 가지 작업을 동시에 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수년에 걸쳐 진행 중인 아랍어 상형문자와 스트리트 웨어를 혼합한 의류 브랜드 ‘앤디 월루Andy Wahloo’ 프로젝트다. 또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티룸과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이런 작업을 하며 관심을 끄는 것이 생길 때면 늘 사진을 찍는다.
존경하는 아티스트, 뮤지션이 있다면?
언급할 아티스트들이 너무나도 많아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잭 오브Zak Ové, 잉카 쇼니바레Yinka Shonibare, 알로 왈라Alo Wala, 섀이핀Shayfeen, 마케스 톨리버Marques Toliver는 내가 존경하는 아티스트들 중 일부다.
현대사회에서 예술이 갖춰야 할 미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예술이 제한적인 방식으로 정의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대부분은 서구권에서 정한 정의에 맞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시선과 편견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예술이 토론의 장을 여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