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대에 오르는 계단 어귀. 건너편으로 소요헌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대구의 북쪽 어귀인 군위는 산과 강이 번갈아가며 숨을 고르는 장소다. 서울을 기준으로 넉넉히 네 시간은 넘게 가야 하는 그곳에 사유원思惟園이 있다. 이름 그대로 ‘생각하는 정원’. 사람의 발길이 쉽사리 닿지 않는 곳에 자리한 사유원은 깊은 숲속에 위치한 보물 같은 거대한 정원이다. 이름 때문이었을까? 업무 일정과 근심, 산적해 있는 도시 삶의 짐은 생각의 정원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왠지 모르게 차창 밖 풍경에 조금씩 뒤로 밀려가는 것만 같다.

사유원 정상부에서 바라본 행구단 풍경.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사유원은 자연과 건축, 예술이 어우러진 15만 평 규모의 수목원이다.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견뎌온 나무와 함께 현대건축 그리고 조경이 조화를 이뤄 찾는 이로 하여금 깊은 사색에 잠기게 만든다. 설립자 유재성 명예 회장은 긴박하게 흘러가는 일상의 리듬에서 잠시 벗어나 스스로를 돌아보고 사유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17년간 사유원을 다듬었다.
도시에서는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 같은 운반 기술에 익숙하다. 하지만 광활한 정원에 문명의 이기는 없다. 그저 두 다리로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갈 따름이다. 사유원의 지형은 자연스레 도시에서의 속도와는 다른 이곳만의 보폭을 강요한다. 그것이 썩 나쁘지 않다. 걸음이 느려지니 심박도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 소리처럼 차분히 가라앉는다.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이 부유하고, 내 안의 나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한다. 산책하며 논박을 주고받았다는 고대 그리스의 소요학파가 떠오른다. 어쩐지 일반 관광지와는 다른 기분이다.
“사유원은 ‘어떻게 머물러야 하는가’에 관한 공간에 가깝다. 각각의 건축물은 서로 드러나려 하기보다 한 발씩 물러나 있다. ”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한 명정. 공연과 명상을 즐길 수 있는 사유원의 대표 건축물 중 하나다.
장식을 지운 자리에 남은 감각
나무가 우거진 숲 사이 수줍게 모습을 내민 구조물 하나가 멀리서 보인다. 나무 바다 속에서 잠망경을 올린 듯 쓱 튀어나온 건축물은 알바로 시자가 설계한 ‘소대’. 인위적 요소는 가급적 숨기고 높은 전망대만이 불쑥 솟아올라 도리어 자신의 존재감을 강제하지 않은 채 드러낸다. 전망대 위로 오르는 계단 구석에 새들의 보금자리가 건축과 함께 공존한다. 상층부에 다다르니 그야말로 숨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든다. 답답하던 마음이 시원하게 뚫리는 느낌이다. 잠시나마 인간의 시선에서 새의 시선으로 시좌를 옮겨본다.

사담은 잔잔한 연못과 건축물이 한데 어우러져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했다.
계단을 천천히 내려와 뒤를 돌면 흡사 비행장의 활주로처럼 생긴 Y자 모양의 수평적 건축물이 환대한다. 알바로 시자가 설계한 ‘소요헌’이다. 그는 한국전쟁의 격전지이던 대구에 위치한 사유원에 피카소의 ‘임신한 여인’과 ‘게르니카’ 전시를 위해 기획한 마드리드 오에스테 공원의 가상 프로젝트이던 ‘아트 파빌리온’을 소요헌이라는 이름으로 조성했다. ‘자유롭게 거니는 집’이라는 뜻의 소요헌은 노출 콘크리트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곳의 특징은 자연 채광의 존재감이다.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빛만으로 공간의 깊이와 질감, 명암을 느낄 수 있다.

알바로 시자가 설계한 소요헌. 자연 채광만으로 공간의 깊이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내부는 개구부를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이 어둠에 잠긴 건물 속 선연한 존재감을 만든다. 마치 ‘여기서부터 다른 시간입니다’라고 속삭이는 듯한 건축물 사이로 빛이 아스라이 깔린다. 소요헌이 초대한 자연광은 벽을 타고 들어와 바닥에 고이고, 오후가 되면 다른 표정을 만든다. 자연과 건축이 만든 하나의 경험은 우리의 시선을 산란하게 하지 않고 꽉 부여잡는다.

사유원 꼭대기에서 자태를 뽐내는 가가빈빈. 커다란 지붕을 최소한의 구조로 떠받들고 있는 게 특징이다. 원오원아키텍츠 최욱 건축가가 설계했다.
공허가 아닌 여백을 위한 비움
소요헌에서 나와 언덕 아래로 살짝 내려가면 구로 철판이 외장재로 쓰인 단정하고 정갈한 느낌의 건축 ‘사담’이 인사를 건넨다. 이로재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한 사담은 묵직하고 진중한 물성으로 주변 풍경을 해치지 않는다. 바람이 건네는 소리, 고요한 듯 일렁이는 잔잔한 호수 앞에 걸터앉아 한가로이 사색에 잠긴다. 장방향 건물의 사담과 연못에 비쳐 만들어진 데칼코마니. 수면 위에 놓인 건축 앞에서 ‘비움’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물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하늘을 담고, 나무를 비추고, 주변의 풍경을 그림처럼 담을 따름이다. 물을 바라보는 동안 꼭 필요한 것만 남고, 나머지는 물결처럼 흩어진다.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한 와사는 다섯 개의 연못 오당에 위치한다.
사담을 뒤로한 채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고 언덕을 오른다. 거기에 두꺼운 외벽이 감싸고 있어 도무지 안을 볼 수 없는 건물이 서 있다. 분명 건축물은 말이 없으나 어딘지 그 안으로 사람을 부르는 것만 같다. 흡사 미로 같은 좁고 기다란 벽을 따라 안으로 들어간다. 몰입감이 더해진다. 이윽고 등장한 공간은 자연석을 쌓아 올린 듯한 벽천이 보인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무엇을 봐야 하는가”보다 “어떻게 머물 것인가”를 묻는다. 명상을 위한 장소인 ‘명정’. 자신을 들여다보는 인식의 흐름을 승효상 건축가의 명정이라는 건축물로 전하는 듯하다.

김익진 선생과 벨기에 출신 찰스메우스 신부의 교유를 기리기 위해 지은 내심낙원 안팎 모습. 알바로 시자가 설계했으며, 2018년 6월 24일 채플 축복식을 했다.
건축물과 자연 사이에 놓인 인간의 자리
이정표를 찾지 않고 그저 발길 따라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눈앞은 초록보다 하늘색의 비중이 많아진다. 그리고 사유원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가가빈빈’이 손짓한다. 원오원아키텍츠의 건축가 최욱이 설계한 건축은 평평하고 넓은 지붕을 최소한의 구조가 떠받들고, 그 사이에 유리가 틈입한 모습이다. 담백한 내부와 어딘지 부유한 듯한 지붕 및 벽체의 거친 질감을 살피다 시선을 유리창 너머로 넘긴다. 몇십 분 전보다는 조금 더 노랗게 물든 사유원과 팔공산의 정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김익진 선생과 벨기에 출신 찰스메우스 신부의 교유를 기리기 위해 지은 내심낙원 안팎 모습. 알바로 시자가 설계했으며, 2018년 6월 24일 채플 축복식을 했다.
뒤를 돌아 지나온 길을 바라본다. 언덕배기 아래 나무 숲 사이로 흰 지붕이 숨은 듯 숨지 않은 듯 고개를 내밀고 있다. 시선이 가는 곳으로 발이 향한다. ‘내심낙원’. 많은 종교 건축물을 설계한 알바로 시자의 노하우와 경험이 응축된 작은 성당이다. 입방체 모양의 전면에 어딘지 과장된 듯한 스케일의 삼각형 캐노피가 튀어나온 모습이 묘한 조형미를 만들어낸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빛의 농담, 자연광을 십분 활용한 건축가의 기지를 또 한 번 느낄 수 있다.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빛의 기울기는 어딘지 신성하고도 영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유원 내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첨단’. 변하는 자연의 파노라마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 사유원이 깨달음을 얻는 연못, ‘와사’로 내려간다. 구멍이 송송 뚫린 철 지붕으로 빛이 오묘하게 오밀조밀 들어온다. 동그란 구멍으로 새어드는 빛의 농도는 대자연과 건축물 사이 어딘가에 던져진 인간의 옷자락에 쌓인 생의 먼지를 말끔히 씻겨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느덧 해가 서서히 드러눕는 시간, 다시 한번 먼 산을 본다. 분명 같은 풍경이지만, 그 풍경의 해상도와 색감은 정원을 오를 때와 사뭇 다르다. 오를 때 마음과 내려갈 때 마음 또한 달라진다. 채워야 할 무언가는 줄어들었고, 지켜야 할 감각은 늘어났다. 사유원 여행은 특별한 결심이나 거창한 깨달음에 그치지 않는다. 어떤 날만큼은 삶을 조금 덜 급하게 살아도 괜찮겠다는 문장 하나를 마음속에 꾹 눌러쓴다.
주소 대구시 군위군 부계면 치산효령로 1176
운영 시간 매주 화요일~일요일 오전 9시~오후 5시(매주 월요일 휴관)
문의 054-383-1278
관람의 사유에서 머물고 음미하는 사유로, 사유원 유지연 회장
Q 내로라하는 건축가 및 전문가와 함께 만든 사유원. 이곳을 더 잘 느낄 수 있는 관람 포인트를 추천해주세요.
A 사유원은 ‘어떻게 머물러야 하는가’에 관한 공간에 가깝습니다. 건축, 조경, 예술, 철학 각 분야 전문가들과 함께 했지만 이것들은 서로 드러나려 하기보다 한 발씩 물러나 있죠. 처음부터 모든 동선을 파악하려 애쓰기보다 걷다 멈추고, 앉아보고, 다시 걷는 리듬의 변화를 느끼길 권합니다. 특히 시선이 멀어졌다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는 지점—숲길 끝의 여백, 건축물과 자연이 맞닿는 경계, 소리가 사라지는 순간—그런 곳에서 사유원의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사유원은 설명보다 체험 이후에 남는 감각으로 이해되는 공간입니다.
Q 얼마 전 사담 다이닝이 리뉴얼했습니다. 사유원이 식문화 여행지로 확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사유원에서의 ‘식食’은 미식의 과시가 아닌 사유의 연장입니다. 사람은 걷고, 보고, 생각한 뒤 결국 다시 먹고 마시며 일상으로 돌아가죠. 그 마지막 단계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주고 싶었습니다. 사담 다이닝은 단순한 레스토랑이 아니라, 사유원의 풍경과 철학을 입안에서 완성하는 공간입니다. 제철 재료, 지역의 결, 절제된 조리 방식은 사유원이 지향하는 태도와 닮아 있습니다.
Q 식문화 외에도 올해 사유원에서 진행 예정인 프로그램을 소개해주세요.
A 관람을 넘어 머무는 사유로 확장합니다. 자연과 건축물 속에서 일정 기간 체류하며 사유와 휴식을 병행하는 스테이 프로그램 ‘사유의 밤’, 사유원의 공간 구조와 풍경을 배경으로 한 소규모 파인다이닝 ‘미식으로 사유하다’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계절별 프로그램도 강화할 예정입니다. 2~3월에는 겨울의 끝자락을 함께 걷는 동행 산책 프로그램 ‘겨울을 사유하다’를 운영합니다. 3월 중순 매화 개화 시기에는 사유원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판소리 축제와 가야금 산조 릴레이 연주 등 국악 축제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