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몸’을 주제로 파격적이고 독창적인 작업을 이어온 미국 사진작가 신디 셔먼이 파리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에서 9월 23일부터 2021년 1월 3일까지 전시를 연다. 약 45년간 이어온 작가 특유의 방대한 셀프포트레이트 작업과 함께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 소장품 중 ‘초상’을 주제로 직접 큐레이팅한 작품을 공개할 예정이다.
Untitled #602, 2019 Courtesy of the Artist and Metro Pictures, New York © 2019 Cindy Sherman
코로나19로 한동안 문을 닫았던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이 9월, 다시 관람객을 맞이한다. 재개관 첫 전시로 21세기 가장 중요한 여성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신디 셔먼Cindy herman의 회고전을 준비했다. 2006년 파리 주 드 폼Jeu de Paume 국립미술관에서 열린 작가의 개인전 이후 오랜만에 열리는 헌정 전시로, 지난 10여 년간 유럽에서 열린 전시 중 최대 규모다. 1975년부터 2020년까지, 약 45년 동안 제작한 작품 170점을 활용한 총 300점 이상의 이미지를 선보일 예정. 총 1500m2(약 450평)가 넘는 공간에 ‘무제 필름 스틸Untitled Film Stills’, ‘후면 스크린 프로젝션Rear Screen Projections’, ‘패션 Fashion’, ‘망가진 인형Broken Dolls’, ‘역사 인물화History Portraits’, ‘할리우드와 햄프턴 타입Hollywood and Hampton Types’, ‘광대 Clowns’, ‘플래퍼 걸과 남성Flappers and Men’ 등의 연작으로 작가의 방대한 작품 세계를 아우르는 전시를 펼친다. 2010년대 작업을 중심으로 작가의 전 생애를 아우르는 작품과 함께 미공개작도 소개한다.
Untitled #582, 2016 Courtesy of the Artist and Metro Pictures, New York © 2019 Cindy Sherman
‘진짜’를 찾기 위한 ‘가짜’의 변주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많은 여성 작가들처럼 신디 셔먼 역시 ‘여성’을 주제로 독창적인 작업 세계를 펼쳐왔다. 특별한 점은 스스로가 자신의 작품 속 유일한 모델로 등장한다는 것. 직접 창조하거나 패러디한 수많은 인물로 변신해 피사체로서 카메라 앞에 서며 그녀만의 유일무이한 현대 초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이어온 셀프포트레이트 작업을 통해 작가는 모더니즘과 가부장적 남성 사회가 규정한 여성성을 비판하고, 여성의 진정한 자아 확립과 주체 회복에 대한 메시지를 전해왔다.
1954년 미국 뉴저지주에서 태어나 1960년대 텔레비전 속 대중문화를 접하며 자란 작가는 1972년 뉴욕 주립대학에 입학해 순수 미술을 전공했다. 회화에 집중하던 중 당시 학교에서 드물게 개념 미술에 해박했던 사진 강사 바버라 조 르벨Barbara Jo Revelle을 만나며 새로운 매체에 눈을 떴고, 변장한 자신이 모델로 등장하는 독특한 콘셉트의 설정 사진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성한 첫 작업 ‘무제 사진 스틸’ 시리즈는 1950~1960년대 미국 영화의 한 장면을 모방한 작품. 소피아 로렌, 메릴린 먼로 등 유명 여배우와 똑같은 모습으로 분장하고 포즈까지 그대로 흉내 낸 흑백사진 속 셔먼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작가는 이 시리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역할을 연기한 위장일 뿐 아니라 이미지를 섹시한 것으로 착각하며 볼 거만한 ‘남성’ 관람자들에 대한 경멸이다.”
이후 패션모델을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아닌 피곤하고 추한 여성의 모습으로 패러디한 ‘패션’ 시리즈, 신체와 관련된 분비물, 혈흔, 토사물 같은 불쾌한 요소를 소재 삼은 ‘애브젝트 아트Abject Art’ 작업, 15~19세기 후반 유럽 귀족의 초상화를 평범한 여성으로 탈바꿈해 패러디한 ‘역사 초상화’ 시리즈, 마네킹을 이용해 억압된 성적 욕망을 표현한 ‘마네킹’ 시리즈 등을 선보이며 신디 셔먼은 동시대 아트 신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스타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금발의 여배우부터 패션모델, 유럽 귀족, 광대, 화가, 억만장자, 주부까지 작품 속에서 다채롭게 변신하는 그녀의 모습은 여성을 향한 사회의 고정관념을 뒤흔들고, 미화된 현상의 이면에 담긴 진실을 끄집어내며, 장르와 재료가 혼재하는 현대미술계에 가장 심플한 방식으로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나의 역량과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 작품들은 단순히 허구적인 영화 스틸이나 인물 사진이 아니라 진실된 삶에 좀 더 접근하고자 하는 매개체다. 나는 매우 인간적인 형태와 아주 추악한 형태를 동시에 부각시켜왔다. 자신을 숨기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극복하고자 하며, 사람의 몸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처럼 보일 수 있는지 모든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 신디 셔먼의 설명이다. 모든 작품에 제목을 붙이지 않는 작가는 또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생각한 이미지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그것은 ‘무제Untitled’였을 뿐이다.”
Untitled #466, 2008 Courtesy of the Artist and Metro Pictures, New York © 2019 Cindy Sherman
Untitled #216, 1989 Courtesy of the Artist and Metro Pictures, New York © 2019 Cindy Sherman
진화하는 아티스트
역대급 회고전을 앞두고 진행된 루이 비통 재단 아티스틱 디렉터 수잔 파제Suzanne Pagé와 신디 셔먼의 일문일답.
(수잔 파제) 2006년 주 드 폼 국립미술관 전시가 파리에서의 마지막 개인전이었다. 이번 회고전은 어떤 의미인가?
(신디 셔먼) 많은 변화가 있었다. 파리와 이 세상뿐만 아니라 내 삶에서도 말이다. 당시엔 없었지만 지금은 파리에 아파트를 한 채 가지고 있고 여러 친구들도 이곳에 살기 때문에 전보다 많은 중대사가 이뤄진다. 그때는 없던 소셜 미디어 관련 작품 등 전시에 새로운 작업이 많이 등장할 것이다. 게다가 2006년에는 존재하지 않던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이 새로 설립돼 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 세계 최고의 문화 공간 중 하나가 되었다.
오늘날 신디 셔먼 전시는 구체적으로 어떤 화두를 던지려 하나?
지루해지지 않는 것, 예전과 똑같은 일상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 다른 방식으로 울림을 주는 선택을 내리고 부딪혀보는 것이다.
근래 들어 첨단 기술을 적용한 작업이나 전시를 종종 선보였다. 기술은 신디 셔먼 프로젝트가 진화하는 데 어떤 영향을 주나?
나는 항상 내 예술을 통해 새로운 대화 방식을 찾고 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작업을 이어오다 보니 색다른 영감을 찾기 어려운 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술은 더 다양한 피사체를 선택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이미지를 만드는 데 있어 전혀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뉴욕현대미술관(MoMA), LA 더 브로드, 상하이 포선 재단에 이어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까지 최근 들어 전시 공간을 색다르게 활용해 사진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펼쳐 보이고 있다. 작품 설치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있나?
활동 초기에는 큐레이터들이 내 작품을 설치하고 카탈로그를 정하게 했다. 그런데 한번은 오프닝 전날 도착해서 보니 내 작품이 마치 거창한 내러티브인 것처럼 설치되어 있었다. 그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전시작을 걸고 공간을 구성할 때도 내가 직접 참여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설치를 직접 컨트롤하는 건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한 작업이라 쉽지만은 않지만, 나는 내 일에 있어서는 내 뜻대로 하려는 면이 강한 것 같고, 그래서 직접 하는 게 편하다.
최근 시리즈 중 여러 작업이 나이와 시간의 흔적에 대해 다루고 있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은 그런 것에 대한 제약이 없이 모든 종류의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 당신의 작품은 현실, 실질적인 데이터와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나?
내 작업에서 현실과 가상의 구분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둘 사이의 특별한 관계는 결코 존재한 바 없었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사진 속에서 일관성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하고 있지만 유일하게 한 가지, 당신의 파란 눈동자만큼은 변함이 없다. 이 부분은 일부러 변화를 주지 않는 것인가?
굳이 컬러 콘택트렌즈를 구해서 끼지 않았을 뿐이다. 그것은 내게 사소한 부분으로 여겨졌다. 오히려 수년 동안 내 손이 도드라지거나 사람들 눈에 띄어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를 주기 위해 노력했다. 다만 최근 인스타그램에 게시하는 이미지들의 경우 눈동자 색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기존 작업에 비해 얼굴 클로즈업 사진이 많아 눈에 더 잘 띄기 때문이다.
매스미디어와 소셜 네트워크 시대, 당신의 사진은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글쎄, 어려운 문제다. 어쩌면 전혀 영향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Untitled #150, 1985 Courtesy of the Artist and Metro Pictures, New York © 2019 Cindy Sherman
Untitled #465, 2008 Courtesy of the Artist and Metro Pictures, New York © 2019 Cindy Sherman
Untitled, 2017 © 2019 Cindy Sherman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과 수잔 파제
2014년 10월, 파리 서쪽 끝 불로뉴 숲속에 문을 연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 미국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건물로, 12개의 돛을 대형 유리판으로 형상화한 아름다운 외관을 자랑한다. 내부에 자리한 11개의 갤러리에서는 동시대 현대미술계에서 의미 있는 작가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수집해온 루이 비통 재단의 방대한 컬렉션을 전시한다. 수잔 파제는 이곳에서 진행하는 전시와 아트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인물로, 2006년부터 루이 비통 재단의 아티스틱 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파리 시립현대미술관 관장을 역임한 국제적인 큐레이터이며 베네치아 비엔날레 기획자로 다수 참여했고 괴테 메달, 아트 콜로뉴 어워드 등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