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대중문화에서는 힙합이 ‘대세’다. 음악부터 방송, 패션, 예술 분야에 이르기까지 ‘힙합 문화’가 유행을 만들고 있다. 힙합이 대중화되기 전이던 1999년,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란 노래로 데뷔해 한국 힙합 신을 이끈 ‘힙합 호랑이’ 타이거JK를 만났다. ‘총알보다 무서운 건 MC의 철학’이라 말하는 그와 나눈 음악 이야기를 통해 힙합이 왜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가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음악 방송에서는 힙합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이 쏟아지고, 예능 프로그램과 광고에는 많은 힙합퍼가 등장한다. 그들의 패션 스타일은 유행이 되고, 럭셔리 패션 브랜드에서도 그들을 모델로 내세운다. 주류 문화에 대한 저항과 자유를 말하는 힙합 음악이 지금의 ‘주류’가 된 것이다. 그게 설령 ‘허세’라 손가락질당하거나 과거 힙합과 달리 저항성이 떨어진다는 비난을 받을지라도 솔직한 노랫말은 불안정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으며 시대의 목소리로 불린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국내에서 힙합 음악은 생소했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국내에 힙합이 ‘대세’가 된 과정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1999년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라는 곡으로 데뷔한 타이거JK다. “라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랩은 ‘시’라고 외치고, 힙합을 ‘사는 방식’이라고 했던 그들의 말.” 힙합 저널리스트 김봉현은 책 <밀리언달러 힙합의 탄생>에서 이 곡에 대해 이렇게 말하며 힙합 문화에 대한 이해를 넓힌 역할을 했다고 평한다. 실제로 드렁큰 타이거는 힙합 장르 최초로 공중파 음악 방송에서 1위를 차지했고, 힙합 크루 ‘무브먼트The Movement’의 수장으로 언더그라운드에 머물던 힙합을 주류 문화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2018년 드렁큰 타이거 10집 <Drunken Tiger X>를 끝으로 온전히 타이거JK란 이름으로 활동하며 새로운 음악을 쉼 없이 발표하고 있다.
그의 음악을 말할 때 가사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데뷔곡에서 “인생의 아픈 고통, 슬픔 모두 다 들어봐야 해”라고 말했던 것처럼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가사에 담아낸다. 힘내라는 말하는 대신 고통과 슬픔을 그대로 보여주며 힘든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는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함께 걷겠다고 선언하듯 노래한다. 대표곡인 ‘소외된 모두, 왼발 한 보 앞으로’는 제목에서 볼 수 있듯 약자의 자리에 서서 함께 앞으로 나아가자고 말한다. 자신의 철학을 노랫말에 담아 ‘힙합 정신’을 노래한 그는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린다. 그런 그에게 힙합이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로 자리매김한 이유를 듣고 싶었다.
“스스로를 ‘힙합 1세대’, ‘힙합 대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 단어에 갇히기보다 ‘타이거JK의 음악’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죠.” 의정부의 한 아파트 단지 내 상가에 자리한 작업실에서 만난 타이거JK는 모든 질문에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 답을 이었다. 2013년 그가 설립한 레이블 ‘필굿뮤직FeelGhood Music’ 사무실 지하에 있는 작업실에서 흔히 방송을 통해 보이는 힙합퍼의 화려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선반에는 다양한 분야의 책과 LP, 음반 등이 빼곡히 꽂혀 있고, 요즘 그가 취미 생활로 즐긴다는 탁구용품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그의 일상이 그대로 담긴 공간이었다.
윤미래, 비지와 함께하는 팀 MFBTY의 해외 공연이 코로나19로 모두 취소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나요?
어제도 밤샘 작업을 했어요. 방송보다 공연을 주로 해와서 남미와 북미 지역에서 계획한 공연이 취소된 상황이 무척 아쉽죠. 그렇다고 무작정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어 작업에 매진하고 있어요. 그래서 지난 5월부터 ‘필굿쨈스’ 프로젝트를 시작했죠. ‘누구나 자유롭게’란 주제로 장르, 아티스트 등 협업에 제한을 두지 않은 참여형 음원 프로젝트입니다.
최근 발표한 <심의에 걸리는 사랑노래>도 필굿쨈스 프로젝트의 일환이죠. 어떻게 이런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되었나요?
보통 새벽에 팬들과 SNS를 통해 쪽지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작업을 해요. 어느 날 팬들이 취미로 그렸다며 보내준 그림이나 사진, 가사, 영상 등을 보는데, 이걸 취미로 남겨두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앨범 커버를 디자인하는 사람들을 찾고 섭외하느라 힘들었는데, 일반인 크리에이터와 함께 컬래버레이션을 하면 그런 과정도 필요 없고, 의미도 있겠다 싶었죠. 첫 곡인 ‘심의에 걸리는 사랑노래’는 소속사 피아니스트 조이Zoey가 작곡을 맡았고 피처링은 요즘 주목받는 보컬이자 래퍼트웰브Twlv가 참여했고요. 뮤직비디오는 윤미래가 갤럭시 기종 스마트폰으로 촬영했어요. 영상 전문가도 아니고 전문 장비를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괜찮은 뮤직비디오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어요. 이후 번외 뮤직비디오는 팬들이 보내준 영상을 이어 붙여 제작했습니다. 트위터에 짧은 영상을 보내달라고 이메일 주소를 남겼는데, 받은 영상을 모아보니 1시간이 넘더라고요. 정말 많은 사람이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렇게 일반인 크리에이터가 많아진 상황을 오랫동안 창작을 해온 사람으로서 어떻게 느끼는지 궁금해요.
너무 잘하는 분을 보면 자신감이 떨어질 때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극이 돼요. 내가 모자란 점이 무엇인지 체크할 수 있는 기회인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는 긍정적이죠. 이런 시대가 오는 게 당연한 수순이라 생각해요. 아버지가 늘 해주던 말이 “머리 커지지 마라. 그러면 무거워진다”였어요. 음악을 하는 일이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죠.
얼마 전 유튜브 스타 펭수와 함께 만든 노래 ‘펭수로 하겠습니다’가 이 작업실에서 탄생했죠. 영상에 작업 과정이 나왔는데 놀이를 하듯이 음악을 만들더라고요. 평소 작업이 어떻게 이뤄지나요?
영상에 나온 모습 그대롭니다. 아티스트로서 고뇌의 시간도 갖지만 작곡은 놀 듯이 시작해요. 기타리스트, 피아니스트 등 다양한 연주자를 불러서 잼 세션을 하죠. 마치 재즈 뮤지션처럼 한두 시간 정도 즉흥 연주를 하다가 좋은 부분이 나오면, 이를 구체화해 하나의 곡으로 만들어요. 펭수도 잼 세션의 한 사람으로 초대받은 것처럼 작업을 했습니다. 작업을 할 때 중요한 건 모두가 즐겁게 하는 거죠. 우선 편안하고 솔직해져야 음악이든 일이든 결과가 잘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힙합 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강하고 거칠 것만 같은데 실제 가사를 보면 자신의 약한 부분을 고백하거나 힘들었던 일화를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쓴 ‘8:45 헤븐’이나 난치병인 척수염에 걸렸을 때의 생각을 담은 ‘내가 싫다’와 ‘TV 속의 나’, 데뷔 20년 동안 있었던 일을 압축해 담은 ‘YET’ 등 개인적인 서사가 담긴 가사가 호소력이 있어요. 그 부분이 힙합이란 장르가 가진 매력인 것 같기도 하고요.
아티스트라고 해서 아픈 경험을 해야만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힘들 때 스스로에게 와 닿는 곡이 나오는 것 같아요. 하지만 힘든 일을 일부러 겪을 수도 없고, 지금처럼 밖에서 많은 경험을 하기 어려운 시기에는 새벽에 팬들과 나누는 대화에서 영감을 얻어요. 제 음악이 힘들었을 때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어서인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분들이 메시지를 많이 보내와요. 어떤 때엔 극단적인 상황에서 유서 같은 편지를 보내올 때도 있어요. 그런 메시지를 받으면 마음이 무겁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제 경험을 담아 답장을 쓰면 위로를 받는 것 같아요. 제 이야기가 담긴 음악도 그래서 듣는 사람에게 위안이 되는 듯합니다. 실제로 해외 팬 중에는 제 가사로 타투를 하는 분도 많아요.
힙합 음악은 그 기원에서도 볼 수 있듯 사회적 차별에 대한 저항에서 나온 장르지만 지금 미디어에서는 이와 상관없이 ‘힙합 신’을 화려함에 초점을 맞춰 소모한다는 평도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어떤 말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과연 이 시대에 맞는 음악이 뭘까요? 필굿뮤직에서 7년 동안 대표로 임하며 처음으로 신인 가수 비비를 데뷔시키는 과정 속에서 최근 깨달은 게 있어요. 타이거JK는 타이거JK 스타일로 하는 게 맞다. 대표로서 직원들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다른 경영자들을 보고 흉내를 낸 적이 있어요. 스스로에 대한 괴리감이 커서 음악 스타일도 변했고, 그때 만든 노래는 사람들에게 설득력도 부족했죠. 특히 요즘처럼 자기 표현이 중요한 때에는 진정성 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타이거JK가 이끄는 기획사 필굿뮤직에서 올해 시작한 필굿쨈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새로운 싱글 앨범 <심의에 걸리는 사랑노래>을 발표했다. 아티스트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참여해 창작품을 교류하는 프로젝트로 차후 음악을 넘어 다양한 분야로 확장할 계획이다. 모든 음원의 수익금은 코로나19 지원금으로 기부하고 있다.
요즘 타이거JK의 화두는 무엇인가요?
필굿뮤직을 차릴 때부터 건강한 음악을 하자고 생각했어요. 제 앨범 중에 가장 많이 판매한 음반인 7집 <필굿뮤직>에서 이름을 가져왔죠. 그 앨범을 내던 때 소속사에서 큰 사기를 당했고, 머물 곳도 없이 급하게 만든 게 지금 기획사에요. 그때부터는 우리가 즐겁게 할 수 있는 활동을 하자고 생각했죠. 이를 통해 우리 음악을 듣는 사람도 함께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사회에 저항도 하고 욕도 하는 건 그동안 충분히 해봤잖아요. 물론 그런 걸 아예 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에요.
‘찻길 조심해, 지각하지 마라, 운동 열심히 해, 제발 싸우지 마라 (중략) 지금 내가 하는 후회 너도 할까 봐….’ 2018년에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이야기한 ‘내 인생의 반’에 나오는 가사는 기존 힙합에서 듣지 못한 기성세대의 말이에요. 주변 어른들이 ‘잔소리’로 하는 주요 대사인데, 이 노래에서는 진심 어린 걱정으로 들려요. 어떤 어른이 되고자 싶나요?
제 나이를 생각해본 적 없어요. 일부러 젊게 살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제 나이 자체를 인식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저는 시간 안에서 사는 게 아니라 현재란 공간에서 살아요. 팬들에게 받는 메시지 중에 어렸을 땐 래퍼를 꿈꿨는데 지금은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직장인이기 때문에 그저 꿈으로 남겨두었다는 이야기가 제법 있어요. 셀피를 찍으면 노인 얼굴로 변환되는 사진 앱처럼 특정 나이가 되면 이런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한다고 자신을 그 안에 맞추는 듯하죠. 우리나라는 나이와 사회적 위치에 대한 프레임이 강한 것 같아요. 사람이 평생 멋있어도 되는 거 잖아요? “운명은 입안에 있다.” 복싱 선수 마이크 타이슨이 한 말인데, 말에는 힘이 있다는 거예요. 난치병인 척수염에 걸렸을 때 할 수 있는 건 스트레스 받지 않는 것밖에 없었죠. 그때 “이 병을 이겨낼 수 있다”고 되뇌면서 가능한 한 좋은 생각만 하려고 했어요. 말만으로 병이 나을 수 있다고 확언할 순 없지만, 말에는 확실히 힘이 있죠. 그렇기에 정해진 어른이라는 모습에 자신을 가두기보다 현재를 살아가야 해요.
2018년 드렁큰 타이거 10집을 끝으로 온전히 타이거JK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죠. 당시 발매 쇼케이스에서 “그때 표현했던 가사나 음악 색깔은 이제 타임캡슐에 그 소리 그대로 넣어둘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는데 드렁큰 타이거로 활동하던 때와 지금의 음악 스타일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드렁큰 타이거로 앨범을 발표할 때도 조금씩 변화했어요. 타이거JK도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이란 프레임이 문제였어요. 모든 곡이 ‘올드 & 뉴’ 안에서 판단되는 것 같았죠. 그래서 드렁큰 타이거란 이름을 버렸고요. 실제로 타이거JK로 활동하면서부터는 그런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졌어요.
윤미래, 비지와 함께 활동하는 MFBTY는 미국 매체 <포브스>, CNN 등에서 K-팝의 글로벌화를 이끈 팀 중 하나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래퍼 3명이 모였기에 기본적으로 장르는 힙합이지만 레게나 재즈 음악의 요소도 느껴져요.
MFBTY로 앨범을 냈을 때 전문가들에게 잘되고 있는 브랜드를 버리고 안 되는 브랜드를 만든 가장 안 좋은 행보라는 혹평을 받았어요. 국내에서 반응이 좋지 않았는데, 다행히 지난해부터 해외에서 호응이 왔죠. 개인 작업을 할 때는 더 진지해지고 부담감을 느끼게 되는데, 셋이 모이면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이 나와요. 그 모습이 음악에 그대로 반영되어, 마치 3명이 놀이동산에 놀러간 듯 유쾌합니다. 하나의 장르에 국한되기보단 메시지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해요. 듣는 사람도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필굿뮤직의 철학을 가장 잘 표현한 그룹이죠.
이제까지 낸 앨범을 순차적으로 들으면 타이거JK의 인생을 소설처럼 본 듯해요. 그 이야기를 통해 듣는 이도 자신이 직면한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앞으로 어떤 삶의 태도를 선택할지 생각하게 되죠. 20여 년의 시간 동안 변하지 않고 꾸준히 이야기하는 주제가 있을까요?
드렁큰 타이거로 데뷔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공연장에서 “One Love”, “사랑이 이긴다”고 말했어요. 실생활에서 그런 말을 하면 아마 유치하게 들릴 거예요. 본래 흔한 말은 그 가치를 쉽게 잃어버리는 것 같아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결국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건 사랑의 힘 덕분이죠. 그래서 저와 MFBTY 그리고 필굿뮤직에 속한 사람들 모두가 사랑을 주는 삶을 살자고 이야기합니다.
타이거JK에게 ‘럭셔리’란 어떤 의미인가요?
타이거JK가 럭셔리죠. 스스로가 멋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은 각자 고유의 스토리를 지녔잖아요? 남의 시선을 생각하지 않은 자신만의 스토리가 바로 럭셔리입니다. 물론 저 역시 다른 사람의 평가가 신경 쓰일 때가 있어요. 그러나 자기 스토리란 상자 안에 주워 담을 게 얼마나 많은데, 타인의 말까지 넣는 건 공간 낭비죠. 부정적인 말은 빼고 긍정적인 말만 상자 안에 담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