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물리학자이자 소설가 파올로 조르다노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을 “생각으로의 초대”라고 말한다. 자유로운 동시에 고립된 이 시간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생각’을 시작할 기회라는 것. 영감과 통찰의 실마리가 산재한 뇌공학자 정재승 교수의 ‘책의 집’은 팬데믹 시대의 집의 근원적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대전시 유성구 죽동 전원주택 단지에 자리한 정재승 교수의 집. 높은 천장고를 이용해 메자닌 구조의 서가를 구성, 2만 권의 책을 구조적으로 포용한 집은 기둥과 보 없이 선의 미학을 살린 것이 특징이다. 설계는 매스스터디스(02-790-6528) 조민석 소장이 맡았다.
미로처럼 끝없이 겹친 책장 사이로 거침없이 전진하는 남자가 있다. 남자의 뒷모습을 좇던 카메라는 그가 한 권의 책을 꺼내 방을 나서는 모습까지 2분 남짓한 영상을 롱 테이크로 담는다. 5만 권의 장서가로 유명한 학자 움베르토 에코 Umberto Eco의 서재를 보여주는 영상이다. 디지털과 미니멀리즘 키워드가 맞물리면서 책이 소외되고 서재가 사라져가는 이 시대에 2만 권의 책이 주인공인 집이 있다. 신경 세포부터 도시 문명에 이르기까지 과학·사회·심리·인문·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호기심의 촉수를 뻗는 탐험가, <과학 콘서트> 저자이자 TV 프로그램 <알쓸신잡>의 패널로 어려운 과학 영역을 대중문화와 예술 영역으로까지 확장한 뇌공학자 정재승 교수가 사는 집이다.
카이로스의 서재
하이 테크놀로지가 이끄는 초연결·초융합 시대에 스마트 시티 마스터 플래너로서 스스로 움직이는 미래 도시를 계획한 과학자가 아날로그의 상징과도 같은 종이 책을 위한 집을 짓다니 어쩐지 아이러니하다. “학자로서 로망과 최고의 사치를 실현한 집입니다. 이 집을 짓기 전에는 가족이 사는 서울 집과 작업실, 제가 지내는 대전 집과 학교 연구실에 책이 뿔뿔이 흩 어져 있었어요. 네 곳의 책을 한데 모으면 2만 5천 권쯤 되는데, 그 책들을 두 겹 아닌 한 겹으로 꽂을 수 있는 서재를 늘 꿈꿔왔죠.”
2만 권의 책을 정량화하면 바닥부터 천장까지 책을 꽂더라도 벽 너비만 100m가 필요하다. 창의적 공간을 위해서는 천장이 높아야 한다는 신경건축학적 이론과 2층 이상으로 지을 수 없는 지구 단위 계획 조건을 맞추되, 2만 권의 책을 구조적으로 포용할 수 있는 집을 지으려면 무엇보다 설계가 중요했다. 설계는 오랜 친분이 있는 매스스터디스의 조민석 소장이 맡았다. 2만여 점의 예술 작품이 있는 미술관 ‘구하우스’에 이어 2만여 권의 책이 있는 주거 공간을 설계하는 것은 건축가로서도 흥미로운 도전이었을 터. “맞습니다. 건축도 결국 사람, 그리고 세상에 대한 관심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업입니다. 책이 2만 권 있다는 이야기에 강한 호기심이 발동했지요. 보편적 주거 공간 이상의 가능성은 물론 뇌과학자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니까요.”
서재에서 남쪽을 향해 열려 있는 테라스에는 대나무를 식재했다. 책을 읽다 눈이 쉬고 싶을 때 바라보는 사색의 정원. 서재 위쪽의 서가로 올라갈 때는 지름길인 사다리를 종종 활용한다.
침실은 노출 콘크리트 마감이 자칫 차가워 보일 수 있어 벽면을 화이트로 도장했다.
조민석 소장은 집을 크게 두 덩어리로 나눈 뒤 스킵 플로어skip floor(건물 각 층의 바닥 높이를 반 층 차로 설계하는 방식)로 연결했다. 도로에 면한 북쪽 진입로를 통해 작은 마당을 지나 현관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게스트룸과 안방이 자리한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복도를 따라 반대편 공간으로 넘어가면 리빙&다이닝 공간이 펼쳐지는데, 높은 천장고를 활용해 상단에 메자닌 구조의 라이브러리를 구성했다. 반대편의 반 층 계단을 오르면 서재의 넓은 홀이 나오고(거실&주방 상단의 서가와 연결된다), 다시 반 층을 오르면 라이브러리의 연장선인 복도를 지나 자녀들의 방이 나오는 구조다.
“왼쪽 덩어리(mass)는 1층 거실&주방 공간의 천장고가 높고, 오른쪽 덩어리는 2층 서재의 천장고가 높아요. 왼쪽 2층의 자녀 방과 오른쪽 1층의 안방이 대치점을 이루지요. 메자닌 구조의 북 캣워크가 반대편 공간과 반 층씩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결과적으로 세 개 층을 쓰는 것 같은 효과가 있죠. 산책의 묘미가 있는 동선, 르코르뷔지에의 프롬나드 promenade 건축을 구현한 셈입니다.”
집의 관전 포인트는 단연 서재다. 책이 주인공인 공간인 만큼 가구를 최소화하고 북 캣워크를 지지하는 인장 케이블과 천장 조명등, 핸드 레일까지 간결한 라인만 강조한 서재는 여느 도서관 못지않은 탁 트인 공간감을 경험할 수 있다. “욕심을 부렸다면 1층 복도 라인, 계단실 아래, 서재의 홀까지 모두 책장으로 채웠겠지요. 책으로 가득한 공간이지만 사실 책은 영감과 통찰을 주는 하나의 도구일 뿐, 목표나 목적은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생각’이죠. 신경건축학에서는 빈 공간이 창의적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죠. 서재의 홀은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공간이에요. 사방을 두른 책장에는 영감과 통찰의 실마리가 가득하죠. 가끔 책을 찾으러 올라갔다가 엉뚱한 책을 발견하곤 그 자리에 앉아 한 두 시간씩 보낼 때도 있는데, 바로 깨어 있는 정신으로 필요한 일에 몰입하는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입니다.”
과학이 어렵다는 편견을 깰 만큼 흥미로운 입담으로 대중에게 다양한 지식을 전하는 과학 커뮤니케이터 정재승 교수. 카이스트 바이오및 뇌공학과 교수이자 융합인재학부 학부장을 맡고 있다.
스페인 작가 발레리오 아다미Valerio Adami의 팝아트 작품이 공간에 생동감을 전한다.
만화책 보고 게임하며 온종일 뒹굴뒹굴할 수 있는 다락방. 오른쪽 거실과 복도, 안방과 유기적으로 소통하는 작은 정원이야말로 팬데믹 시대에 꼭 필요한 공간.
집이라는 삶의 화첩
신경과학적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자연과 함께할 때 행복감을 느낀다. 테라스가 넓고 창이 커서 나무와 꽃이 잘 보이는 공간에서 더 빨리 치유된다. 요리를 하면서도 거실의 가족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오픈 키친에서 더 큰 만족감을 느낀다는 연구도 있다. 정재승 교수는 집을 지으면서 어떤 구조에서 스트레스를 덜 받고 더 많이 웃는지, 가족이 더 많이 대화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 “아파트에 살 때는 아파트가 불편한지 몰랐어요. 편리하고 안전하게 주어지는 것들 때문에 어린 시절 주택에 살던 기억을 잊고 지냈죠. 집을 지으려고 마음먹은 후 ‘언제 가장 행복한가’를 고민했어요. 정해진 규격에 삶을 끼워 맞추는 대신 하얀 백지 위에 삶을 그리는 것이야말로 창의적 활동으로 여겨지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건 늘 다채로운 영감을 주는 구성이다. 앞서 설명했지만 이 집은 르코르뷔지에가 주창한 ‘건축적 산책’을 경험할 수 있다. 길게 이어진 라이브러리를 통과해 옥상까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가 다시 다락방을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순환 구조로 각 층마다 외부 정원이 직간접적으로 연결된다.
“1층은 복도 양쪽으로 정원이 있어요. 나무 덱이 깔린 중정은 사계절을 고려해 단풍나무와 그라스를 식재했고요, 게스트룸 옆 후정은 손님들에게 시각적 휴식을 전할 수 있도록 관망하는 정원을 구성했어요. 서재 테라스에는 대나무를 심었는데, 책장을 덮었을 때 눈을 쉬게 해요.” 안방에는 온 가족이 들어갈 수 있는 넉넉한 크기의 욕조를 설치해 마당을 바라보면서 물놀이를 즐길 수 있다. 자녀들 방 위쪽으로 옥상까지 연결되는 다락방은 그냥 흘려보내는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만화책과 게임기를 두고, 커다란 매트를 깔아 온종일 뒹굴뒹굴한다.
책의 집이면서 동시에 예술 작품의 집임을 알 수 있는 거실&주방. TV장과 스피커, 소파 뒤쪽의 아일랜드와 주방 가구 모두 간결한 디자인의 화이트 컬러를 선택하고, 그린 컬러 소파와 팝아트 작품으로 포인트를 줬다.
게스트룸에서 바라보는 후정은 이끼와 단풍으로 조형미를 살린 것이 특징. 조경은 조경 전문 업체 Vert M(마르쿠엘, 070-4136-9181)에서 진행했다.
또한 구조는 단순하면서 마감 재질에 변화를 준 공간은 쉽게 질리게 마련. 반면 기하학 구조로 다양한 레이어를 만들되 소재를 단순화한 것 역시 집을 다채롭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이다. “외부로 통하는 창이 많아서일까요? 바라보는 지점에 따라, 빛이 드리우는 정도에 따라 굉장히 자연적이었다가 또 인공적인, 늘 새로운 국면을 마주하는 것 또한 복잡한 구조가 만들어내는 즐거움이에요.” 동쪽으로 높은 창을 구성한 거실과 주방은 아침 식사를 할 때 빛이 들어온다. 반대로 서쪽으로 창을 낸 서재는 해 질녁 노을을 감상할 수 있다. 외부를 천연 목재로 마감한 것도 특징이다. 썩지 않도록 바닷물에 담갔다 건조한 목재는 가공할 때 화학물질을 사용하지 않아 친환경적이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햇빛에 자연스럽게 노출되면서 색이 바랜다. 처음에는 벽돌집을 짓고 싶었어요. 한데 외벽은 나무고 내부는 노출 콘크리트라니, 뭔가 거꾸로 된 게 아닌가 싶었죠. 하지만 살아보니 역시 조 소장님의 선택이 옳았어요. 책의 집인데 나무로 지어야지 돌로 지으면 이상했겠죠? 겉에서는 나무가 보이고 안에서는 돌의 물성이 색다른 대조를 만들어내고…. 이것이 바로 매 순간 새로움을 주는 건축의 좋은 예가 아닐까요?”
마당을 바라보며 가족이 함께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커다란 욕조.
지붕에 누워 해 질 녁을 바라보는 상상이 현실이 됐다. 옥상에 앉아 와인 한잔할 수 있도록 아웃도어 테이블과 라운지체어를 둘 계획이다.
사다리꼴 모양의 대지(대지 면적 308.6㎡, 연면적 371.51㎡)에 따라 꺾인 면으로 구성한 나무 집. 추상적 형태로 느껴지도록 건물과 담장, 대문 등의 구분 없이 담백하게 마감했다. 외벽과 같은 소재로 마감한 맞배지붕에서도 기하학의 다양한 변주를 즐길 수 있다.
내일의 클래식
이사한 지 2년 반이 지나고서야 <행복>을 초대한 이유가 궁금했다. “처음 이사 와서는 책만 가득 채워져 있고, 가구도 들이지 않고, 조명도 달지 않고 텅 비어 있었어요. 시작부터 완벽히 세팅하기보다는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하나씩 들이자며 마음을 다스렸죠. 가구는 물론 조명, 소품까지 살면서 채워나가는 만족감이 크더라고요. 이제 아웃도어 가구만 남았어요.” 삶의 속도와도 연결되는 이야기다. 정재승 교수는 지금껏 세상이 돌아가는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살아왔다. 학부 시절부터 대전과 서울을 오갔고, 1년에 열 번 이상 해외 출장과 방송·강연을 병행하며 지금까지 논문을 90편 이상 발표했다. 그뿐이랴! 틈틈이 과학의 대중화를 위한 책도 쓰고, SNS(@jsjeong3)로 친근하게 소통한다. 그런데 올해 초 갑자기 세상이 멈췄다.
“예전에 TV에서 중년의 남자가 화분에 분무기로 물을 주면서 잎을 따는 장면이 나왔는데, 어떻게 저리 한가할 수 있을까 의아해한 기억이 나요. 그런데 요즘 제가 그러고 있어요. 예전에는 바쁘다 보니 집에 들어오면 쓰러져 자기 일쑤였는데, 코로나19 덕분에 삶의 시계가 느려지면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됐죠. 오롯이 집에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며 유튜브 보면서 요리도 하고, 필라테스도 시작했어요.” ‘행복이 가득한 집’은 관계를 회복하는 공간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각자가 행복한 순간을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놓으니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갑갑함이나 스트레스가 아니라 유희요, 좋은 얘기를 더 많이 나누고, 함께 웃는 공간이 되더라는 것. 느리게 살아도 지구가 돌아가고, 자연이 회복되는 걸 경험하면서 자기반성의 계기를 만든 것 역시 팬데믹의 선기능이다.
“미니멀리즘 키워드가 대두되면서 사람들은 가볍게 살기위한 노하우를 설파합니다. 이 집은 그런 방향에 역행하는건데, 그런 의미에서 20년쯤 후에 굉장히 특별한 공간이 될 거예요. 세상을 바라보고 인용하는 레퍼런스가 유튜브나 페이스북 등 온라인이 아닌 책이라면, 저는 좀 남다른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클래식은 결국 타임리스라는 뜻이거든요. 어느 시대에나 모두에게 받아들여지는 ‘고전’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려면 클래식한 종이 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이 필요하다고 믿어요.”
책의 집 설계를 맡은 매스스터디스 조민석 소장은 “2만 권의 책과 다섯 가족의 삶을 포용해야 하는 공간 설계는 건축가로서 무척 흥미로운 도전”이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조민석 소장은 2014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으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으며, 건축을 통해 사회·문화·도시 생활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펼친다. 픽셀하우스, 상하이 엑스포 2010: 한국관, 다음 스페이스 닷 원, 티스톤/이니스프리, 부티크모나코, 사우스케이프 등의 대표작이 있고, 최근 마곡지구 스페이스K 서울 미술관을 완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