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네임>의 비장하고 처연했던 최무진은 이제 좀 보내줘도 되지 않을까. 배우 박희순에게는 훨씬 더 많은 얼굴이 있다.
스티치로 어깨 부분을 강조한 라이더 재킷은 프라다. 그런지 스타일의 록 티셔츠는 존 바바토스. 검은색 팬츠는 버버리.
인스타 팔로워 수가 50만 명에 육박한다. 지하철 역사 안에는 당신의 생일을 축하하는 광고가 달렸고. 이 정도면 청춘 스타 아닌가?
하하. <마이네임>이 넷플릭스에서 흥행하면서 갑자기 팔로워가 크게 늘긴 했다. 국내 팬들만큼이나 많은 해외 팬들이 DM을 보내주는데, 내가 읽을 수 없는 언어가 많다. 중국어, 태국어, 인도네시아어, 아랍어, 일본어···. 다 읽진 못하고 감사한 마음만 가진다.
배우로 사는 게 쉽지 않은 세상이다. 연기도 잘해야 하고, SNS 개인 홍보도 해야 한다.
예전엔 신문 인터뷰가 전부였는데, 이제는 홍보 방향이 SNS 쪽으로 크게 넘어가긴 했다. 글로벌 팬들을 만날 수 있다는 건 긍정적인데, 한편으로는 홍보 채널이 한쪽으로 쏠리다 보니 운신의 폭이 좁아지는 것 같기도 하다.
중견 배우로서 갑자기 이렇게 큰 인기를 얻게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나도 궁금해서 계속 생각해봤다. 왜 나 같은 놈을 이렇게 좋아해주는 걸까? 물론 제일 큰 이유는 <마이네임>에서 내가 맡은 역할이 매력적인 빌런이었기 때문이겠지. 여기 굳이 한 가지를 더 찾자면 드라마 속에서 악역과 홍보 활동 중에 만나는 인간 박희순 사이의 괴리감이 신선하게 보인 건 아닐까 싶다. 어쨌든 내 인생 마지막일 수도 있는 이벤트라고 생각하기 때문에(웃음) 이런 상황을 즐기려고 한다.
전면에 커팅 디테일을 적용한 흰색 셔츠는 디스퀘어드2. 보라색 데님 팬츠는 리바이스. 에나멜 부츠는 후망.
그런데 정말로, 과거보다 지금이 더 멋있다.
와이프를 잘 만나서인 것 같다. 아내(배우 박예진)는 늘 “오빠는 50대에 잘될 줄 알았어”라고 말한다.
박희순이라는 배우를 생각하면 허스키한 목소리가 먼저 떠오른다. 개인적으로는 ‘말보로 레드’ 같은 목소리라고 생각하는데, 어떤가?
예전에는 목소리가 콤플렉스였다. 목소리가 탁하니까 대사 전달에 더 신경을 써야 했고, 배역에도 제한이 있었다. 내 목소리를 스스로 썩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8년 전쯤, 애플 브랜드 광고의 내레이션을 맡았는데, 그제야 이 목소리도 쓸 데가 있구나 싶었다. 글로벌적으로는 내 목소리가 먹히는구나 생각했다.(웃음)
체크무늬 셔츠 재킷은 랑방 by 분더샵. 애니멀 프린트를 입힌 푸른색 쇼츠는 찰스 제프리 by 분더샵. 이너웨어로 입은 면 티셔츠와 스니커즈, 네크리스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곧 선보일 작품이 넷플릭스의 <모범가족>이다. <마이네임>에 이어 이 작품에서도 마약 조직 2인자로 등장한다. 마약왕이라 불러도 어색하지는 않겠다.
하하. 사실 <마이네임> 촬영 중에 <모범가족> 대본을 받았는데 배역의 성격이 <마이네임>과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고사했었다. 하지만 김진우 감독이 <마이네임>보다 훨씬 가볍고 따뜻한 이야기라고, 같은 캐릭터가 아니라고 나를 설득하더라. 힘 빼고 자연스럽게 연기하면 캐릭터가 더 돋보일 것 같다면서. 시청자들도 직접 <모범가족>을 보고 나면 다르게 느끼지 않을까.
마초적이고 강한 캐릭터를 많이 맡아왔지만, 마냥 강한 역할은 아니었다. <마이네임>도, <1987>도, <마녀>도, 각자의 페이소스를 감추고 있는 복합적인 인물들이었다.
<마이네임>의 김바다 작가는 처음부터 최무진 역으로 나를 원했다고 하더라. 그래서 왜 꼭 나여야만 했느냐고 물어봤더니 “박희순은 가만히 있어도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인다”라고 했다. 눈빛만으로도 많은 감정을 표현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고. 기분 좋은 말이었다. 아마 다른 작품의 감독들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늘 어두운 건 아니었다. <올레>의 코믹한 역할이나 <아름다운 세상>의 착한 아버지 역할은 어땠나? 이런 소시민 연기를 할 때 더 즐거워 보였다.
실제로 신나게 연기했다. 나는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따뜻한 영화를 좋아한다. 친구들이 알파치노나 말런 브랜도 좋아할 때 나는 더스틴 호프먼이나 로빈 윌리엄스를 좋아했으니까. 영화 쪽으로 넘어오면서 무겁고 거친 역할을 많이 하다 보니 밝은 역할에 갈증이 있다.
가죽 라펠의 음각 디테일이 포인트인 재킷과 팬츠는 모두 벨루티. 흰색 셔츠는 트랜짓. 에나멜과 벨벳 소재로 완성한 레이스업 슈즈는 크리스찬 루부탱.인위적인 주름을 준 데님 셔츠와 볼드한 링 모두 보테가 베네타. 티셔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공백이 거의 없이, 끊이지 않고 작품을 하는 배우다. ‘재충전’ 같은 단어를 생각해본 적은 없나?
연극할 때 선생님들이 말씀하시길, 배우는 레미콘처럼 끊임없이 돌아야 한다고 하셨다. 피아니스트도, 화가도, 끊임없이 스스로를 괴롭히면서 작품을 생산하는데 배우들도 그래야 하지 않느냐고. 술 마시고 노는 걸 배우의 덕목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고.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쉬다 보면 도태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일부러 쉬고 싶지는 않다.
이제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는 배우가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배우가 됐을 것 같다. 시나리오를 선택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과거에는 내가 좋아하는 역을 맡는 게 우선이었지만, 지금은 팬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역할을 더 맡아보고 싶다. 그래서 관객들이 원하는 연기나 캐릭터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마이네임>을 하면서 시청자들이 최무진이라는 캐릭터를 해석하고,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창조해내는 모습을 봤다. 어떤 팬들은 내 연기의 의도를 정확히 눈치채기도 했고, 그걸 뛰어넘어 또 다른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배우로서 그런 소통의 과정이 행복하고 짜릿했다. 그런 경험을 조금 더 해보고 싶다.
지금 촬영 중인 <무빙>은 원작 웹툰 작가인 강풀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전문 드라마 작가가 쓰는 작품과 어떤 점이 다른가?
여러 면에서 다르다. 우선 본인 원작을 직접 옮기다 보니 설정 수정이 과감하다. 원작보다 세계관 자체가 더 확대되는 느낌이랄까? 한편으로는 강풀 작가가 그리는 웹툰의 작법이 시나리오에 묻어날 때가 있는데, 그게 배우들에게는 더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주더라. 나는 그게 좋았다.
넷플릭스의 <마이네임>, 애플티비의 <닥터브레인>, 디즈니 플러스의 <무빙>까지, 연극으로 시작했던 무명 배우가 이제는 글로벌 3대 OTT를 모두 섭렵한 배우가 됐다.
‘운칠기삼’이라는 단어를 자주 생각한다. 나보다 훨씬 훌륭한 배우들이 많지만 그분들이 다 기회를 잡는 건 아니니까. 나도 열심히 했지만 분명 운도 많이 따랐을 거다.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문득 영화 <맨발의 꿈> 속 당신의 대사가 떠오른다. “여기까지 왔는데, 원 없이 뛰어야지”라는 대사다.
딱 그거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더 열심히 해봐야지. 끝이 어딘진 모르겠지만.
GUEST EDITOR 이기원(인터뷰) STYLIST 이종현 HAIR 이에녹 MAKEUP 정수연 COOPERATION 디스퀘어드2(310-1593), 리바이스(540-8887), 버버리(3485-6500), 벨루티(536-1895), 보테가 베네타(6905-3791), 분더샵(2056-1234), 크리스찬 루부탱(541-8550), 존 바바토스(6905-3665), 트랜짓(3479-1525), 프라다(3442-1830), 후망(070-7786-1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