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045년,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 고철 덩어리 건물로 가득한 도시 풍경이 암울하다. 지구는 식량 문제로 황폐하게 변한 상황. 볕 들 날 없을 것 같은 미래 세계에서 탈출구가 있다면 가상현실 게임 ‘오아시스’다. 천재 개발자 제임스 할리데이가 창조한 오아시스는 자신이 원하는 아바타를 선택해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상상하는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다. 제임스 할리데이를 선망하는 소년 웨이드 와츠는 VR 헤드셋을 쓰고 오아시스에 접속해 학교에 가고, 친구를 만나며, 게임과 쇼핑을 즐기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2018년 개봉한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의 줄거리다. 가상현실 공간에 1980년대 이후를 주름잡은 대중문화 아이콘을 등장시켜 마약 떡볶이처럼 버무린 덕분에 ‘덕후’들의 지지를 얻었지만, 사실 이 영화의 흥미로운 지점은 언제쯤 영화 속 오아시스가 구현될 것인가라는 궁금증을 품게 만든 것이었다.
응답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도착했다. 팬데믹이라는 이동 불능의 현실이 오아시스의 성장을 한 박자 앞당겼다는 해석도 더해졌다. 간판도 바뀌었다. ‘메타버스 Metaverse’가 그것이다. 가상, 초월을 뜻하는 ‘메타’와 현실 세계를 뜻하는 ‘유니버스’를 합쳐 만든 단어로 ‘가상과 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세계’라는 개념이다. SF 소설 <스노 크래시>에서 처음 등장한 단어로, 게임 플랫폼을 중심으로 성장한 메타버스를 떠받치고 있는 건 MZ 세대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세대엔 메타버스야말로 또 하나의 세상, ‘디지털 지구’인 셈이다.
대표 사례 몇 가지를 소개하면, 우선 미국에서 유튜브와 틱톡보다 10대에게 더 사랑받는 ‘로블록스’다. 플랫폼에 접속한 사용자는 자신이 선택한 아바타를 통해 대화하고 게임을 만들 수 있으며, 게임 속 화폐로 아이템을 사거나 실제 화폐로 환전할 수도 있다. 비대면 사회가 되면서 접속자 수가 두 배 늘었을 정도로 폭발적 인기를 누리는 중이다. 요즘 초등학생은 하루의 상당 시간을 <레디 플레이어 원>의 주인공처럼 메타버스에서 보낸다. 마인크래프트를 하고, 제페토에서 친구를 만난다. 흥미로운 사실은 지난해 제페토에서 가장 유행한 공간이 ‘학교’라는 점이다. 등굣길이 막힌 아이들이 메타버스에 학교를 짓고 친구들과 다양한 활동을 하며 대화를 나눈 것.
아이돌 그룹 블랙핑크는 메타버스에 멤버들을 닮은 아바타를 등장시켜 뮤직비디오를 선보이고 팬 사인회까지 열었다. 사인을 받기 위해 메타버스로 몰려온 팬은 4천3백만 명에 달했다. 구찌는 아예 피렌체 매장을 메타버스에 옮겨놓고 고객을 불러들였다. 매장을 대신 방문한 아바타에게 입힐 아이템과 액세서리를 구입할 수도 있다. 푸마·디즈니·나이키 역시 속속 매장을 열었는데, 나이키 운동화는 무려 5백만 켤레가 팔려나갔다. 분위기를 감지한 페이스북,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은 물론 통신, 게임, 유통 회사들은 메타버스에 터를 잡으려고 발 빠르게 움직이는 중이다.
전문가들은 메타버스가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뒤를 잇는 세 번째 IT 혁명이라고 말한다. 인터넷, 스마트폰이 생기기 전과 후를 떠올리면 메타버스가 안겨줄 미래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메타버스는 디지털 기술이 빚어낸 가상공간,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하기 위한 현실 세계의 확장 공간이라는 점이다. “Reality is real.” 현실이야말로 진짜다.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의 마지막 장면에서 오아시스를 개발한 할리데이가 소년 웨이드에게 귀띔한 대사다.
문일완은 <바자> <루엘> <엘라서울> 등 독자층이 제각각인 패션 잡지, 남성 잡지, 라이프스타일 잡지를 넘나드는 바람에 무규칙한 문법이 몸에 밴 전직 잡지쟁이다. 그래픽 노블을 모으고 읽는 것, 아무 골목길이나 들어가 기웃거리는 게 요즘 취미 생활. 칼럼니스트로 여러 지면에 글을 쓰느라 끙끙대고, 사춘기 코스프레 중인 딸과 아웅다웅하며 하루를 보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