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로 살다 허브에 빠져 농부가 되고, 허브의 매력을 책으로 담아내기까지 그 여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내가 꿈꾸던 삶도, 여자의 삶도 포기해야 할 때가 있었다. 허브는 대체 내 삶을 어떻게 바꿔버린 걸까? 허브를 인격적으로 만난 건 허브 세밀화를 그리기 시작한 2015년부터였다. 당시에 ‘나는 왜 이 삶을 선택했나? 어디를 향해 가는 건가?’ 방향성을 잃었고, 우울증에 빠졌다. 그때 인생의 모든 것을 걸도록 허브가 삶으로 들어왔다.
“세상에 쓸모없는 허브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 앎이 부족할 뿐이다.” _이븐 시나
내 농장의 허브는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생하던 외래종이 많다. 1년 동안 한국 기후에서 허브는 두 번의 고비를 맞았다. 한여름의 무더위와 한겨울의 한파. 지중해성기후에서 자라던 로즈메리나 열대기후에서 자라던 레몬버베나에 이런 날씨는 실로 지옥과 같다. 지상부와 뿌리가 말라 죽는 이 시기에도 치료법은 있다. 사람이 복잡한 생각과 얽힌 환경을 잘라내듯 허브 줄기를 싹둑 잘라주는 것이다. 지상부를 짧게 자르면 허브는 고통을 참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수분을 빨아들이고 영양분을 운반하던 줄기의 길이가 짧아지니 오히려 회복 능력이 좋아진다. 어느새 생장점에서 순이 돋고 다시 생명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허브는 그렇게 내게 인생을 이겨내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꽃이 진 자리에 씨앗이 생기고 여물면 모주母株(mother plant)는 품은 씨앗을 땅에 토해낸다. 때로 씨앗은 바람에 날려 예상치 못한 곳에 뿌리를 내린다. 그 연약하던 씨앗은 주어진 삶에 순복하며, 간혹 낯선 환경과 싸우며 자라고 늙고 죽어간다. 이러한 허브의 생육 여정은 우리 삶의 여정과 다르지 않다. 아무도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수 없다. 자연의 순리 속에서 시간과 함께 생존할 뿐. 무엇보다 식물의 탄생은 씨앗이 아니라 모주의 희생에서 시작한다.
“꽃을 보고자 하는 사람에겐 어디에나 꽃이 피어 있다.” _앙리 마티스
같은 속명에 속하더라도 허브의 종에 따라 향기나 모양이 다른 것처럼 세상 모든 이가, 하물며 가족도 나와 다르다. 이를 깨닫기까지 오래 걸렸지만, 그 깨달음의 바탕에 허브가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꽃을 보고자 하는 이에겐 어디에나 꽃이 피어 있듯 삶에도 아름다움은 도처에 자리한다. 나는 가족을 떠나 여자 혼자 겁 없이 농업에 뛰어들었다. 치매 노인과 장애 청소년을 대상으로 원예 치료 수업을 해왔고, 그림 그리는 농부 작가로 살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파머스레시피’라는 요식 사업도 시작했다. 허브의 풍미·향·효능으로 다른 이의 삶의 질도 높아지길 바라며 벌인 일이다. 일 년 중 힘든 고비를 두 번이나 이겨내며 성장한 허브가 최상의 맛과 향기를 뿜어내듯 내 삶이, 당신 삶이 풍파 속에서도 노련해지고 지혜로워지길, 아름다워지길! 바로 허브와 내가 자라는 시간이다.
<올 댓 허브>는 허브·향신료 전문 도서관 라이브러리H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이용 방법 | 오뚜기함태호재단 홈페이지(ottogifdn.org)에서 회원 가입 후 도서관 이용 예약
이용 시간 | 평일 오전 10시~오후 4시(토·일요일, 공휴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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