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발걸음을 위로하는 한 그릇. 낙지에 곱창과 새우를 넣은 이 자극적인 음식은 우 리의 지친 심신을 치유해준다.
‘글 쓰는 요리사’로 잘 알려진 박찬일 씨는 ‘로칸다 몽로’와 ‘광화문 국밥’의 주방장이자 해박한 지식과 단정한 문장으로 음식과 관련한 이야기를 전하는 음식 칼럼니스트다. 그 치열한 기록이 <노포의 장사법> <백년식당> <오사카는 기꺼이 서서 마신다> 등의 책으로 나왔다. 최근엔 계절 식재료 이야기를 다룬 <오늘의 메뉴는 제철 음식입니다>를 펴냈다.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에서 주인공 이노가시라는 한 낙곱집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그의 주특기다. 낯선 땅에서 무얼 먹어야 할지 모를 때는 원래 그런 법이다. 더구나 점심 한 끼에 삶을 걸다시피 하는 주인공이니까. 이 드라마의 인트로는 매우 거창하다. “오직 방해받지 않고 먹는 한 끼의 밥, 그것이 현대인을 치유한다”고 외친다. 틀린 얘기가 아니다. 그래서 그가 고른 밥은 낙곱새다. 낙지와 곱창에 새우까지 들어가는. 여기에 그는 우동 사리와 볶음밥까지 시킨다. 그러고는 땀을 뻘뻘 흘리며, 더구나 공짜에다가 무한 리필 가능한 반찬에 깜짝 놀라며―일본인의 한국 식당 순례에서 이건 디폴트다. 반찬이 무료에 리필도 무한이라는 건 일본에선 상상도 할 수 없으니까―낙곱새를 먹는다. 그는 감칠맛이 터진다고 외친다. 그렇다! 낙곱새는 감칠맛의 모든 요소를 모은 음식이다. 한국 음식이 그렇게 진화해온 건 아마도 직장인 사회가 음식 문화를 이끌어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노가시라가 그렇듯이, 우리 역시 한 그릇 밥에 하루의 운수를 걸지 않는가. 맛있는 점심이나 퇴근 후 안주 말고 우리를 위로해주는 치유책이 따로 있던가.
친구들과 몇 달 전 부산을 걸었다. 부산은 대개 동쪽의 해운대냐 자갈치시장이 있는 구도심이냐 정도가 동선의 기본이다. 구도심에서 대개는 자갈치와 부평시장, 국제시장, 광복동 라인을 걷지만 우리는 중앙동으로 향했다. 진짜 부산은 아마도 이곳일지 모르겠다. 미로 같은 길, 산복도로로 올라서는 좁은 골목, 자동차 한 대조차 지나갈 수 없는 길이 이어졌다가 끊긴다. 직장인을 위로하는 밥집들이 있는 동네. 어느 집에 들어서든 먹을 만한 곳. 낙곱이 탄생한 곳이라는 설이 있는 동네도 중앙동이다. 낙지에 곱창을 넣은 이 요상한 이종 배합의 음식. 거기에 이제는 새우까지 들어가는 게 기본이다. 나는 젊은 시절, 서울에서 낙곱을 먹었다. 아마도 부산에서 올라온 메뉴였을까. 기억하는 것보다 중앙동의 낙곱은 훨씬 더 맵고 달았다. 역시 부산다운 맛이었다. 어떤 음식은 담백하기 그지없고, 이렇게 자극적인 음식은 그것대로 끝을 보는 게 부산식이다.
한 낙곱새집에서 낮술을 마셨다. 끓여가며 먹는 게 낙곱 또는 낙곱새의 불문율이다. 즉석요리는 요리하는 과정에 손님이 참여하는 듯하지만, 실은 아무것도 안 한다. 때가 되면 알아서 ‘이모’들이 뒤집어주고 잘라주고 섞어준다. 그러고는 한마디 한다. 부산식으로는 이렇다. “이제 드셔도 되예.” 저 말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 시간이 오기까지 양념이 용을 쓰며 끓는 과정을 지켜본다. 이윽고 달고 매운 낙곱새는 위를 채우고, 냄새는 옷과 머리카락에 달라붙는다. 우리는 땀을 흘리며 먹는다. 빨갛고 매운 양념이 온몸을 뒤덮는다. 종종 “이제는 먹어도 된다”는 말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 그 문장에는 모호함이 숨어 있다. ‘먹어도’는 아직 절정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성미 급한 이에게 이모님이 주는 신호이면서 동시에 국자질을 해도 된다는 면죄부다. 낙곱새는 ‘먹어도’라는 신호에 먼저 낙지를 건져야 한다. 과숙되면 질기다. 곱창은 더 기다리는 게 좋다. 부드럽게 익히려면 마지막까지 참을 때도 있다. 곱창은 의외로 빨리 안 익는다. 건더기를 먹다 보면 때가 온다. 벌겋고 진하며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미궁의 진득한 국물이 보글거리는 시간 말이다. 낙곱새는 절대 비싸면 안 되는 음식이다. 그러니 낙지와 곱창과 새우라는 기본 재료가 그다지 고급일 수 없다. 다 안다. 낙지가 질겅거리고, 새우가 작더라도 이의를 제기하는 건 추천하지 않는다. 양념에 들어가게 마련인 온갖 조미료가 불편하면 시키지 말아야 한다. 낙곱새는 그런 음식이다. 살다가 한 번쯤 경험했을 바닥을 떠올리며 먹는, 치유의 음식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거창하지만.
낙곱새전골
재료(2인분) 낙지 1마리, 곱창 500g, 새우 10마리, 배춧잎 1장, 양파 슬라이스 ½줌, 멸치·다시마로 끓인 육수 3컵, 청양고추 슬라이스 1개분, 다진 마늘·진간장·고춧가루 1큰술씩, 멸치 액젓 ½작은술, 설탕 1작은술, 맛술·대파 슬라이스 2큰술씩, 당면 사리 1인분
만들기
1 낙지는 소금으로 문질러 씻은 후 적당한 크기로 토막 낸다.
2 곱창은 기름을 손으로 뜯어 제거하고 3~4cm 길이로 자른다.
3 새우는 손질해서 씻고, 배춧잎은 포를 뜨듯이 너붓하게 자른다.
4 청양고추, 마늘, 고춧가루, 간장, 액젓, 설탕, 맛술을 섞어 양념장을 만든다.
5 전골냄비에 양파와 배춧잎을 깔고 육수를 부어 끓인다. 곱창을 넣고 중약불에서 10분간 끓이다가 양념장을 넣어 한소끔 끓인다.
6 낙지와 새우를 넣고 대파를 넣는다.
7 당면이나 우동 사리를 넣어 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