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 박유경 씨의 삶과 작업의 중심에는 꽃을 바라보고 텃밭을 가꾸는 일상이 있다. 이태원의 62㎡ 빌라에서 작은 정원을 꾸리며 살아가는 그는 씨앗을 심고, 꽃과 열매가 자라나는 과정을 지켜보며 자연의 변화를 만끽한다. 그렇게 가꾼 정원은 삶의 단단한 버팀목이자 영감의 샘터가 되어준다.

모종부터 하나씩 직접 심어 가꾼 작은 정원. 이미 자란 식물을 들이기보다 씨앗과 모종이 조금씩 자라 꽃을 피우는 과정을 지켜보는 시간이 가장 큰 기쁨이다.
2022년 파라다이스 아트랩 전시를 시작으로, 재밌는 일은 다 해보자는 뜻을 담아 다양한 크리에이터가 모인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 다다다 콜렉티브. 이곳에서 박유경 디렉터는 대표 프로젝트인 프리즈 아트 나이트를 비롯해 전시 연출과 공간 디자인, 다이닝 프로젝트 등 폭넓은 활동을 전개해왔다. 런던과 서울을 오가던 그가 이태원의 빌라에 새로운 터를 잡은 것은 1년 전, 테라스가 있는 집을 만나면서부터다.

거실에 앉으면 테라스를 지나 남산까지 풍경이 한눈에 이어진다.
테라스에서 시작된 집 이야기
박유경 디렉터의 집은 꽃과 정원, 그리고 이들과 함께한 시간이 켜켜이 쌓여가는 곳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 역시 집 안 곳곳을 채운 꽃과 식물. 그 중심에는 단연 테라스가 있다. 이사를 오면서 회색 시멘트 바닥 위에 우드 타일을 깔고 소파와 테이블을 놓은 뒤, 에키네시아와 델피늄, 피튜니아 등 형형색색의 꽃을 심었다. 그렇게 평범했던 테라스는 꽃이 감싸는 정원 속 야외 거실이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새로 심은 씨앗이 자라는 과정을 지켜보고, 반려묘 롱롱이와 함께 새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낸다. 테라스를 마주한 거실에는 소파 대신 빈티지 라운지체어가 자리하고, 에스닉한 러그와 커다란 몬스테라, 하늘색 포인트를 더한 테이블이 어우러져 작은 부티크 호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거실에 앉아 정원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여행을 온 듯한 기분이 든다고. 계절마다 달라지는 테라스를 바라보는 시간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 중 하나다.

정원에서 갓 딴 민트와 직접 만든 바질 올리브유를 곁들인 키위는 박유경 디렉터의 여름 별미다.
테라스 한편에서는 작은 텃밭을 가꾸며 도시농부의 삶을 즐긴다. 바질과 파슬리, 민트·로즈메리, 타임 같은 허브부터 토마토와 호박까지 직접 키우고, 그렇게 수확한 재료들은 곧바로 식탁으로 이어진다. 갓 딴 바질과 토마토는 파스타에 올리고, 로즈메리와 타임은 스테이크나 치킨에 곁들여 먹는다. 영국에서는 허브를 사서 사용했지만 서울에 와서부터 직접 키우기 시작했는데, 그때그때 따 먹는 허브가 지닌 풍미, 토마토가 초록빛을 띨 때와 노랗게 익을 때, 또 완전히 붉어졌을 때 저마다 다른 맛을 낸다는 사실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익는 속도도, 빛깔도 모두 다른 토마토는 하루하루 달라지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이 크다.

흙을 만지고 식물을 돌보는 시간은 어느새 일상의 자연스러운 루틴이 되었다.

정원에서 갓 딴 민트와 직접 만든 바질 올리브유를 곁들인 키위는 박유경 디렉터의 여름 별미다.
과정을 가꾸는 사람
박유경 디렉터에게 정원의 진짜 즐거움은 수확보다 자라나는 시간을 함께하는 데 있다. "저는 늘 결과보다 과정을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전시를 기획할 때도 잘 만든 디자인이나 연출도 중요하지만, 하나의 흐름으로 어떻게 경험하게 만들지를 가장 많이 고민하거든요. 머물고, 먹고, 대화하고, 기억하면서 그 과정이 감각으로 남는 경험을 만들고 싶어요. 정원도 마찬가지예요. 심은 씨앗이 사계절을 지나 햇빛과 바람을 견디며 조금씩 자라고, 직접 손으로 다듬고 수확해 먹는 그 모든 과정을 함께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죠."

요리를 즐기는 박유경 디렉터에게 주방은 테라스만큼이나 오래 머무는 공간이자, 정원에서 거둔 재료가 한 끼 식사로 완성되는 곳이다.
그에게 지금의 테라스는 씨앗을 심고 새잎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까지, 생명이 움트는 과정을 함께하는 공간이다. 그 시간을 통해 얻은 감각은 다시 작업의 영감이 되고, 바쁜 일상 속에서 삶의 균형을 되찾는 힘이 되기도 한다.

오랫동안 모아온 가구와 오브제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거실. 해바라기가 여름 풍경을 완성한다.
"정원은 특별히 뭘 하지 않아도 매일 나가면 조금씩 달라져 있잖아요. 그냥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 물을 주고, 시들지 않았는지 한번 살펴보는 정도인데도 그 시간이 저한테는 큰 위안이 되더라고요. 달라지는 모습을 보는 게 너무 재밌고, 그러면서 저도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요.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고부터는 '아, 이제는 이거 없이는 살 수 없겠구나' 싶죠."

박유경 디렉터의 집에는 곳곳에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숨어 있다. 공간 연출에 사용한 아이스 와인 쿨러를 가져와 선반처럼 활용하고 있다고.

물감이 묻은 작업 테이블과 직접 그린 대형 회화, 작은 액자들이 마치 아틀리에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빈티지 다이닝 테이블과 플로어 스탠드를 더해 거실 한편에 작은 작업 공간을 꾸렸다.
정원을 가꾸고, 그 속에서 자신을 마주하는 시간을 보내며 이곳은 식물을 돌보듯 스스로를 다독이고 키워가는 공간이 되었다. 해외를 오가며 오랫동안 '내 삶의 터전은 어디일까'를 고민하던 그는 이 집에서의 생활을 통해 비로소 집의 의미를 찾은 것 같다고 말한다. 자신과 고양이 롱롱, 그리고 식물이 함께 자라는 테라스에서 언젠가 조금 더 넓고 흙과 맞닿은 정원이 있는 집을 꿈꾸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