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의 옛 궁궐부터 하늘 높이 솟은 최신 빌딩 숲, 왁자지껄한 을지로 야장까지.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TWL 김희선KimHeesun 대표가 말하는 서울은 ‘과거와 최신 문화, 다채로운 일상이 빠른 속도로 다이내믹하게 믹스된 도시’다. 이렇듯 에너지 넘치는 도심을 사랑하면서도, 그가 일과를 마치고 매일 돌아가는 곳은 남한산성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싼 조용한 숲세권 아파트. 유행을 좇아 공간을 작위적으로 채우는 대신 스스로 쓸 물건을 고르고, 차를 우려 마시며 매일의 일상을 돌보는 도구들로 완성한 안식처다.

집에 있는 대부분의 가구는 가구 디자이너인 남편 심규일 씨가 만들었다. 고양이 그림은 이미주 작가 작품, 사진 족자는 수오 작가 작품이다.
10년 넘는 시간 동안 한국 리빙 신scene의 흐름을 정갈하고 단단하게 이끌어온 라이프스타일 숍 TWL(Things We Love). 우리 생활에 필요한 의식주를 책임지는 일용품부터 한국 공예 작가들의 작품과 전시까지 TWL은 단순한 매장이 아니라, 취향을 공유하는 플랫폼이다. 특유의 단정함과 진정성을 고집하며 두꺼운 팬덤을 유지해온 중심에는 김희선 대표가 있다. 스스로 쓸 물건을 고르고, 차를 우려 마시며, 식물을 가꾸는 일상의 경험을 브랜드 콘텐츠로 치환해내는 그에게 집은 단순한 휴식처 그 이상이다. 자신의 취향과 일상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영감의 공간이자 온전한 숨을 고르는 다정한 쉼표 같은 그의 집을 찾았다.

전시 관람 후 큰맘 먹고 구입한 국가무형유산 소목장 박명배 선생의 머릿장. 전통 형태의 한국 가구지만, 여백의 미를 살려 공간 분위기에 잘 녹아든다.
집에 들어서면 가장 눈에 띄는 공간 중 하나가 바로 작업실이다. 방 두 개를 하나로 길게 연결한 작업실 문을 열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한쪽 벽면에는 진공관 앰프를 비롯한 오디오 시스템이 묵직하게 자리 잡고, 수천 장의 LP판과 CD, 그리고 손때 묻은 책이 공간 가득 밀도 있게 쌓여 있다. 거실로 크게 내어놓으면 자칫 난잡해 보일 수 있는 부부의 거대한 수집품을 이 방 안에 단정하게 가두어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방 벽에 뚫린 작은 창문이다.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거실 밖까지 부드럽게 퍼지도록 벽을 터 창을 냈다. 창문을 통해 음악이 소통하는 구조가 이뤄지면서 이 작업실은 닫힌 방이 아니라, 거실과 유기적으로 호흡하는 집의 아늑한 서라운드 시스템이 되었다.

작업실에서 거실 쪽을 향해 창문을 냈다. 작업실은 본디 두 개였던 방을 하나로 확장한 것. 작업실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를 벗 삼아 하루를 보낸다.
최소한의 선으로 다듬은 공간
2018년 무렵 이사 온 이 집은 대대적인 구조 공사를 하지 않았다. 이전 집에서 전체를 고치는 큰 공사를 경험했는데, 엄청난 자원이 폐기되는 과정에 깊은 회의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공사는 줄여야겠다고 다짐했어요. 물건도 이 집을 위해 새로 사지 말고, 기존에 있던 것을 최대한 살려서 쓰고자 했죠.”
그 대신 생활의 중심축을 바꾸는 최소한의 영리한 공사만 진행했다. 가장 큰 변화는 주방과 작업실이다. 집에서 가장 좋은 자리였음에도 주방 바로 옆을 가로막고 있던 실외기실 벽을 과감히 허물고, 실외기를 다른 방 안쪽 구석으로 옮겼다. 불룩 튀어나와 있던 벽이 사라지자 주방과 다이닝 공간은 한결 넓고 시원한 시야를 갖추었다. 가구 디자이너로 일하는 남편의 오랜 취미인 음악을 위한 공간도 구조 변경을 통해 태어났다. 원래 두 개로 나뉘어 있던 방을 하나로 텄고, 그 벽면에는 거실 쪽을 바라보는 네모난 창문을 냈다.

실외기실을 트고 주방과 다이닝룸을 넓게 확보해 지금의 공간을 완성했다. 부엌 베란다 쪽으로 가벽을 세워 창문을 냈다.
소파를 비우고 찾은 유연한 풍경
보통 아파트 거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커다란 소파가 이 집에는 없다. 대신 공간 곳곳에 크고 작은 식탁과 테이블이 여러 개 놓인 독특한 풍경이 펼쳐진다. 여기에는 반려묘들과 얽힌 치열하고도 다정한 사연이 숨어 있다. “고양이 중 한 마리가 자꾸 소파를 화장실로 쓰는 버릇이 있었어요. 그래서 소파를 세 번이나 버려야 했죠. 여러 방법으로 노력하다가 결국 ‘네가 행복하면 됐지’ 하는 마음으로 소파를 포기했어요.”

다도를 즐기는 김희선 대표의 취향 공간. 여러 기물들을 사용해 차의 맛과 향을 음미한다.
소파가 사라진 자리는 자연스럽게 테이블과 의자로 채워졌다. 그러면서 지금의 데이베드형 소파가 자리 잡았다. 그 소파에는 다다미 두 쪽을 놓았더니 소반과도 잘 어울린다. 테이블이 많아지면서 부부의 일상은 앉고 머무는 행위의 경계도 유연해졌다. 소파에 기대어 바닥에 앉던 익숙한 습관 대신 테이블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는 일상이 거실의 새로운 중심이 되었다.

주방에 놓인 그릇장은 철저히 김희선 대표의 주문에 따라 남편이 제작한 것. 나무 도마의 높이, 가장 큰 그릇의 크기 등을 미리 측정해 꼼꼼하게 주문했다.
집 안의 뼈대를 잡아주는 가구 대부분은 가구 디자이너인 남편의 손에서 탄생했다. 그중 결혼 전부터 모아온 수많은 물건을 정리하고 신혼집을 거쳐 이 집으로 넘어올 때도 가장 먼저 살아남아 중심을 잡아준 가구가 있다. 남편이 국가무형유산 보유자 선생님에게 직접 배워 만든 한국 전통 ‘사방탁자’다. “한국 가구는 좌식 베이스라 스케일이 크지 않아서 의외로 아파트에 놓았을 때 공간과 무척 잘 어우러져요. 다만 그 고유한 아름다움을 살리려면 물건을 가득 채우기보다 주변에 여백을 남겨두어야 하죠.” 사방탁자가 가르쳐준 비움의 미학은 집 안 가구 전체의 차분한 균형으로 이어졌다.

남편 심규일 디자이너가 직접 제작한 사방탁자. 한국 전통 가구는 매치하기가 어렵다는 편견을 깨뜨려준, 부부가 가장 좋아하는 가구 중 하나다.
일상을 돌보는 도구들
오전의 부지런한 흐름이 지나간 오후, 집 안에는 은은한 찻물 끓는 소리와 정갈한 향이 감돈다. 김희선 대표가 일상에서 꾸준하게 큰 비중을 두는 의식을 꼽자면 다도가 있다. 다도를 평생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취미라 말하는 그는 차 전문 브랜드 ‘티 노트Tea Note’를 직접 론칭할 만큼 차에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다. “같은 동백나뭇잎인데도 산지와 발효법에 따라 깜짝 놀랄 만큼 달콤한 꿀 향과 단맛이 피어나는 과정이 매번 신기해요.”

고양이의 완강한(?) 반대로 소파 여러 개를 버린 후 데이베드형 소파로 바꿨다. 소파 위에 다다미를 깔았더니 시원한 느낌뿐 아니라 미니 소반과도 잘 어울린다.
그의 다도 테이블 위에는 사연 있는 다정한 도구가 놓여 있다. 밀봉된 차 패키지를 깔끔하게 뜯기 위해 따로 제작한 작은 가위, 길한 의미를 지닌 조롱박 형태의 받침대, 미니 소반 모양의 잔 받침까지. 다도라는 것이 물의 양과 온도만 맞추면 되는 단순한 행위지만, 좋은 도구와 함께 차를 우려내는 시간은 그 자체로 힐링을 선사한다.
가구 이외의 일상을 채우는 소소한 살림살이는 고스란히 김희선 대표가 소개하는 ‘매일의 쇼핑 리스트’이자 TWL의 큐레이션 자체다. “문득 모아놓고 보니 거의 다 TWL에서 판매하는 물건이더라고요. 일부러 세팅한 게 아니라, 일상에서도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제품을 자연스럽게 TWL에서 소개하는 거죠.”

부부가 좋아하는 것이 가득 담긴 작업실. 음악과 책, 다양한 일상의 이야기가 오가는 공간이다.
그의 물건 고르는 철학은 집안일이라는 일상의 노동에서 가장 빛을 발한다. 누구에게나 귀찮고 피하고 싶은 집안일도 자신의 취향에 맞는 제대로 잘 고른 물건 하나가 있으면 뜻밖의 즐거움이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하기 싫은 일일수록 마음에 드는 좋은 물건을 써야 해요. 그러면 ‘이걸 한번 써볼까?’ 하는 호기심과 설렘이 생기거든요. 평생 쓸 생각으로 큰맘 먹고 장만한 빨래 건조대를 펼칠 때가 그래요. 그 도구를 쓰고 싶어서라도 귀찮은 일에 기꺼이 움직이게 되죠. 좋은 물건이 주는 위안 덕분에 집안일이 덜 괴롭고, 때로는 재밌어지기까지 해요.” 자신이 신뢰하는 물건을 직접 생활 속에 들여 사용하고, 그 쓸모와 온기를 다시 세상에 제안하는 것. 김희선 대표의 집은 단순히 아름다운 공간을 넘어 물건 하나로 삶의 태도를 바꾸는 가장 정직하고 다정한 생활의 큐레이션 현장이다.
김희선 대표는 라이프스타일 숍 TWL, 공예품과 도예 작가들의 작품을 심도 있게 소개하는 핸들위드케어를 이끄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다. 의식주 전반에 걸친 좋은 물건을 큐레이션할 뿐 아니라, 작가들과의 전시 기획, 차 전문 브랜드 티 노트 운영 등 다방면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일상에서 오랜 시간 쓰이며 생활을 아름답게 만드는 소박한 물건의 가치를 세상과 나누는 중이다. twlsho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