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안나 렐리 마미Arianna Lelli Mami와 키아라 디 핀토Chiara Di Pinto가 이끄는 스튜디오페페Studiopepe에서 오랫동안 작업실로 사용해온 밀라노의 아파트를 프로젝트 ‘더 인티머시The Intimacy’로 새롭게 공개했다. 2026 밀라노 디자인 위크 기간 처음 문을 연 이곳은 오래된 집의 건축 위에 그들이 디자인한 가구와 예술 작품, 장인의 손길을 더해 완성한 공간이다. 두 디자이너가 함께 일하며 쌓아온 시간과 밀라노의 주거 문화가 한 채의 집 안에서 새로운 풍경을 이룬다.

스튜디오페페의 키아라 디 핀토와 아리안나 렐리 마미. ‘더 인티머시’는 그들이 선보이는 2026년 매니페스토 프로젝트다.
밀라노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스튜디오페페는 공간과 가구, 전시와 이미지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고유한 서사를 만들어가는 디자인 스튜디오다. 비밀스러운 멤버스 클럽을 구현한 매니페스토 프로젝트 ‘클럽 언신Club Unseen’, 버려진 금 가공 공장을 타로와 연금술의 세계로 탈바꿈시킨 ‘레스 아르카니스테스Les Arcanistes’는 이들의 독보적 역량을 국제 무대에 각인시킨 대표작이다. 이후 프리츠한센의 밀라노 플래그십 스토어와 갈로티&라디체Gallotti&Radice 쇼룸을 설계하고, 박스터와 타키니 등 여러 가구 브랜드와 협업하며 활동 영역을 넓혀왔다.

메탈 벽면 앞에 놓인 놀Knoll의 바르셀로나 데이베드를 중심으로, 목재 체어와 석재 받침 위 검은 조각이 재료와 형태의 대비를 이룬다.
아리안나 렐리 마미와 키아라 디 핀토는 특정한 양식을 답습하기보다 장소가 품은 역사와 문화, 그 안에서 이어져온 삶의 방식에서 디자인의 실마리를 찾는다. 오래된 건축과 현대적 가구, 대담한 색채와 절제된 형태를 한 공간에 교차하면서도 어느 한 요소가 전체를 압도하지 않도록 균형을 조율한다. 여기에 빛의 흐름과 소재의 질감, 장인의 손길이 깃든 디테일을 더해 공간을 감각적 장면으로 완성한다.
“저희는 공간을 고정된 배경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유기적 환경으로 바라봅니다. 그곳에 머무는 사람의 인식과 행동, 나아가 삶의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프로젝트의 첫걸음은 언제나 장소의 정체성과 그 안에 숨어 있는 이야기를 살피고 이해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곳은 과거 스튜디오페페의 작업실이기도 하다.
이러한 철학이 가장 내밀하게 드러난 곳이 밀라노 비알레 아브루치 20Viale Abruzzi 20에 자리한 이들의 아파트다. 스튜디오 설립 초기부터 창작의 거점이 되어온 이곳은 삭막한 사무실이라기보다 사람의 온기가 스며 있는 오래된 주택에 가까웠다.
새로운 작업실로 터전을 옮길 때가 되자 두 디자이너는 아파트를 완전히 비워내는 대신 자신들의 시간이 담긴 한 채의 집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사람과 공간 사이에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이는 친밀한 관계를 탐구한 스튜디오페페의 2026년 매니페스토 프로젝트 더 인티머시는 이렇게 시작됐다.

대리석 상판의 원형 테이블 위에는 타키니Tacchini의 소피아 테이블 램프를 올리고, 곁에는 블록 스튜디오Bloc Studios의 삼각형 미러 스툴을 배치했다.
“이곳은 창작과 연구, 그리고 우리의 일상이 자연스럽게 뒤섞이던 장소였습니다. 새로운 장을 시작하며 이 집이 저희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찬찬히 돌아보고 싶었어요. ‘친밀함’이라는 주제 역시 오랜 시간 이곳에 쌓인 기억과 감정에서 자연스럽게 비롯되었습니다.”
오래된 작업실을 한 채의 집으로
더 인티머시의 바탕에는 밀라노의 오래된 주거 문법이 단단하게 자리한다. 문을 사이에 두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여러 개의 방, 천장을 장식한 섬세한 스투코, 오랜 시간 사람들의 발길에 윤이 난 헤링본 패턴의 목재 바닥은 이 공간이 지나온 시간을 보여준다.

높은 장식 천장과 클래식한 몰딩이 남아 있는 밀라노의 옛 주거 공간에 금속 선반과 기하학적 오브제를 더해 현대적인 감각을 불어넣었다.
“이 집에서 가장 밀라노다운 요소를 꼽자면 서로 부드럽게 이어지는 방과 풍부한 재료, 그리고 ‘절제된 화려함’일 것입니다. 현대적 디자인과 긴 역사를 품은 물건을 나란히 배치해 시간의 층을 만드는 방식 역시 밀라노의 집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지요.”
스튜디오페페는 특정 시대의 양식을 박제하듯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시의 자유롭고 우아한 감각을 오늘의 생활 방식에 맞게 재해석했다. 역사성을 지닌 건축의 뼈대와 가구, 예술 작품과 장인의 기술은 저마다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면서도 한 공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집 안에 들어서면 매끈한 스틸과 깊은 결을 품은 트래버틴이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다. 차갑고 반듯한 금속과 자연이 만든 무늬를 지닌 석재의 대비가 공간의 강렬한 첫인상을 완성한다. 알리몬티 밀라노Alimonti Milano와 협업해 제작한 맞춤형 벽난로는 한 점의 조각처럼 방의 중심을 잡는다. 베라구스 플러스 실레마Veragouth+Xilema가 만든 부아즈리와 인칼미Incalmi의 에나멜 구리 타일은 오래된 벽면에 깊이와 은은한 빛을 더한다. 각 재료가 지닌 시간과 표정을 나란히 놓아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트래버틴 벽난로가 공간의 중심을 묵직하게 잡아준다. 여기에 스튜디오페페가 디자인한 갈로티&라디체의 슈펫 벨벳 암체어와 유니카Uniqka의 사일로 레더 사이드 테이블을 더해 소재와 색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톤온톤 공간을 완성했다.
가구와 작품이 생활의 장면이 되는 집
집 안을 채운 가구와 조명은 대부분 스튜디오페페가 직접 디자인한 것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시기에 여러 브랜드와 협업해 만든 결과물을 쇼룸처럼 늘어놓지는 않았다. 개별 작품은 조각처럼 또렷한 존재감을 지니면서도 벽과 바닥, 곁에 놓인 예술 작품과 유기적으로 어우러져 하나의 장면을 완성한다.
갤러리아 인칸토Galleria Incanto에서 빌려온 컬렉션과 사진가 안드레아 페라리Andrea Ferrari의 작품도 집 안 곳곳에 자연스럽게 놓였다. “또한 사진과 조각, 가구와 공예품을 장르별로 구분하지 않고 섞어 배치해 오랜 시간 저희의 취향과 안목이 쌓여온 듯한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둥글고 풍성한 소파의 실루엣과 가죽 암체어의 굴곡진 퀼팅, 중앙에 놓인 이도Ido 테이블의 비정형 석재 상판이 서로 다른 소재와 질감을 이어주며, 예술 작품과 가구가 하나의 조형적 풍경을 이룬다.
아리안나 렐리 마미가 직접 흙을 빚어 만든 도자 작품은 집 안에 또 하나의 작고 내밀한 세계를 펼쳐 보인다. 미니어처 극장이나 작은 무대, 비밀을 간직한 장식장을 닮은 조각 안에는 자연의 파편과 현실 혹은 상상 속 생명체, 시적 오브제가 숨어 있다. 멀리서 전체의 실루엣만 바라봐서는 그 안의 이야기를 알아차리기 어렵다.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 몸을 숙여 안쪽을 들여다볼 때 비로소 작은 장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에서 스튜디오페페의 시간이 가장 짙게 남아 있는 곳은 아리안나와 키아라가 책상을 나란히 붙이고 일하던 방이다. 팀원들과 의견을 나누며 스케치 수백 장을 현실의 공간과 가구로 발전시킨 기억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2026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처음 공개한 더 인티머시는 행사의 막이 내린 뒤에도 전시와 토크, 워크숍이 이어지는 프로젝트 아파트로 남는다. 한때 구성원들의 아이디어와 일상이 오가던 작업실은 이제 예술가와 장인, 디자이너와 방문객이 모여 다채로운 이야기를 나누는 오픈 하우스로 진화했다. 스튜디오페페가 이 집의 문을 계속 열어두는 까닭은 명확하다. 자신들의 세계를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경계를 허문 만남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싹틔우기 위해서다. 또한 이곳을 찾은 이들이 공간과 사물, 예술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발견하도록 이끈다. 그렇게 이 집은 스튜디오페페의 내일을 준비하는 역동적 실험실이 되어가고 있다.
스튜디오페페는 아리안나 렐리 마미와 키아라 디 핀토가 2006년 밀라노에서 설립한 디자인 스튜디오다. 인테리어와 제품 디자인은 물론 전시 기획, 크리에이티브 디렉션과 스타일링 등 전방위적 영역에서 활약하며 색채와 물성, 빛의 흐름과 공예적 디테일을 완벽하게 결합한 감각적 공간 미학을 전 세계에 선보이고 있다. studiopepe.inf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