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 조경 프로젝트부터 실내 플라워 연출, 작은 꽃다발 다듬기까지 꽃과 식물을 매개로 경계 없는 작업을 이어가는 그린그라피제이의 김주암 대표. 양평에서 만난 그의 첫인상은 “자연스럽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김주암 대표의 온실. 손때 묻은 정원 도구와 대중없이 놓인 화분, 흩뿌려진 흙까지 모두 연출된 장면처럼 아름답다.
유년 시절의 기억에서
어릴 적 체화된 기억과 감각은 어느 순간 불쑥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조경 디자이너 김주암 대표 역시 그런 경우다. 전혀 다른 분야를 전공하다 취미로 배운 조경 디자인이 10년 넘게 이어온 업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그에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제가 기억하는 유년 시절의 집에는 늘 정원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조경 일을 하셨는데, 집은 작고 불편해도 항상 나무와 꽃을 심고 연못을 파 정원을 만드셨죠. 집이 산 중턱에 있어 주변의 모든 풍경이 마치 우리 집의 큰 정원 같았어요.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자연을 보고 만지며 자라서인지 식물에 대한 애정과 감각이 저도 모르게 스며든 것 같아요.”




양평에서의 시간은 오로지 정원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도시에서는 흙 묻고 땀에 젖은 모습이 흐트러진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곳에서는 그마저도 모두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그의 작업은 틀에 얽매이기보다 감각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공간이나 상황에 맞춰 디자인을 자유롭게 변주하는데, 다양한 영역의 프로젝트를 이어올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중 하나가 소수 건축사사무소와 함께 한 양평 주택단지 프로젝트 ‘송학리의 생각’. 그 이후 세 번의 프로젝트를 함께 하면서 이 동네와 인연을 쌓았고, 결국 양평에 3백 평의 정원과 세컨드 하우스를 마련하게 되었다.

실내는 우드 톤으로 맞춰 아늑한 느낌을 자아낸다. 곳곳에 수납공간을 짜고 단열도 특별히 신경 썼다.
“예전에는 집을 좋아하는 물건과 내 취향으로 가득 채웠는데, 이곳에서는 아무리 뭔가를 갖다 놔도 자연 앞에서는 모두 작게 느껴져요.”
정원 생활자의 집
“세 번째 프로젝트를 할 때였는데, 끝까지 남아 있던 대지가 계속 눈에 밟혔어요. 바로 앞에 산이 있고 물길도 지나가는 게 정말 좋았거든요. 언젠가 꼭 내 정원을 갖고 싶다 생각을 해왔는데, 양평을 오랫동안 오가며 동네를 잘 알고 애정도 생긴 터라 이곳에 자리를 잡았어요.” 무엇보다 정원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컸기 때문에 가장 먼저 고려한 것도 식물의 자리였다. 소꿉놀이하듯 하나둘 식물을 옮겨 심었고 정원이 어느 정도 완성될 무렵, 식물을 관리하며 머물 곳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작은 컨테이너 집을 들이게 되었다. 공간 디자인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소수 건축사사무소(sosu2357.com)를 비롯한 시공·가구 업체에 의뢰했고, 이들이 작업 현장을 오가며 다듬어주었다.

최소한의 면적 안에 필요한 요소만을 담아 공간을 콤팩트하게 구성했다.
이 집의 가장 큰 특징은 정원을 집 안 깊숙이 들이는 너른 통창이다.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정원이 보이길 바라 양쪽 문 중 하나를 없애고 세로로 긴 창을 냈다. 한 면을 가득 채운 통창 덕분에 어디에서든 자연을 마주할 수 있다. 여덟 평 남짓한 작은 공간인 데다 서울의 집과는 달리 비어 보이길 원해 수납에 특히 신경 썼다. 집 안 곳곳, 침대 아래와 벤치까지 수납공간으로 활용했다. 정원 작업 후 자주 씻다 보니 순간 온수기의 용량을 늘렸고, 이를 숨길 수 있는 싱크대를 마련하면서 정원 생활에 꼭 맞는 집이 완성됐다.

침대에 앉아 바깥을 바라보면 정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런 이유로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 역시 침대다. 이 풍경을 바라보며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정원이 삶으로 이어질 때
집의 형태가 바뀌니 일상도 서울에서의 모습과 자연스럽게 달라졌다. 이곳에 오면 가방을 내려놓고 가장 먼저 꽃부터 살핀다. 시든 꽃을 잘라내고 풀을 뽑고, 작물을 돌보는 일이 마치 명상처럼 느껴진다. “초봄에는 겨우내 묵은 가지와 줄기를 정리하며 새싹을 맞이할 준비를 해요. 아무것도 없어 보이던 땅을 뚫고 새싹이 올라오는 모습은 언제 봐도 감동적이죠. 꽃이 피는 시기에는 꽃가지를 잘 다듬고 잘라주면 개화 시기가 훨씬 길어져요. 5월에 핀 장미를 11월까지도 볼 수 있어요. 얼마나 자주 들여다보고 손길을 주느냐에 따라 생명력이 달라진다는 걸 직접 경험하니 새삼스럽더라고요. 겨울에는 계절을 잘 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약한 부분을 덮어주는 정도만 해도 봄이 되면 다시 스스로 올라오거든요.”

지난해 팜파스를 심으며 새롭게 만들어진 장면이다. 이곳에서 온실 쪽을 바라보면 식물들이 레이어드되며 정원이 길게 확장된 듯한 느낌을 준다.
소박한 실내와 달리 정원은 매달, 매 계절 풍경을 달리한다. 3~4월에는 수선화와 튤립이, 5월이면 보랏빛 밥티시아가 물들인다. 여름에는 목수국이, 가을이 되면 골든 피라밋이 노랗게 만개한다. 겨울에는 그라스와 상록수가 꽃이 진 정원을 지킨다. 좋아하는 꽃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김주암 대표는 2026년에는 평소에 하지 않던 컬러풀한 꽃으로 좀 더 다채로운 정원을 만들어볼 계획이다.



김주암 대표가 직접 촬영한 사진들. 정원의 사계절을 하나하나 기록해오고 있다.
집 안에서는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때로는 친구들을 초대해 작은 테라스 공간에 앉아 식사를 하고 불멍을 즐기기도 한다. 집을 굳이 꾸미지 않아도 그 자체로 충분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예전에는 집을 좋아하는 물건과 내 취향으로 가득 채웠는데, 이곳에서는 아무리 뭔가를 갖다 놔도 자연 앞에서는 모두 작게 느껴져요.”

작업 공간으로 사용하는 온실은 집주인이 없을 때 동네 주민들이 고추를 말리는 장소로 쓰이기도 한다.
김주암 대표는 집에 대한 로망의 80%는 이뤘다고 말한다. 집에서 정원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성공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할 정도다. “정원이 생기면서 좋아하는 게 더 많아졌어요. 사계절을 지내며 자연을 바라보면 모든 게 다 의미 있고 아름다워요. 꽃도, 잡초도, 지나가는 새까지도요.” 나머지 20%는 사람들과 정원 생활을 나누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으로 채우고 싶다고. 그 일환으로, SNS를 통해 집이 궁금하다는 메시지를 종종 받으며 시작하게 된 ‘오픈 가든’은 이제 10월마다 함께 모여 작물을 캐고 식사를 하는 연례행사가 되었다. 좋아하는 꽃 이야기를 할 때 가장 눈을 반짝이고, 식물이 자라는 모든 순간이 경이롭다고 말하는 사람. 문 앞에 펼쳐진 자연과 정원을 ‘거실’이라 부르는 김주암 대표는 집을 통해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배우고, 이를 나누며 누구보다 풍요로운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김주암의 반려 정원 도구
1 전지가위와 꽃가위 나무를 다듬고 식물의 얇은 줄기나 꽃을 자를 때 사용한다.
2 가위 집 작업 중 분실을 줄이고 도구를 빠르게 꺼내 쓸 수 있다.
3 고구마 순창, 잡초 제거기, 호미(왼쪽부터) 고구마 줄기를 끼워 사선으로 꽂기 좋은 아이템. 작은 잡초를 뽑는 잡초 제거기와 초화류를 심을 때 사용하는 호미.
4 물뿌리개 관이 좁아 커피 내리듯 천천히 물을 주기 좋다. 식물은 천천히 물을 뿌려야 물길이 생기지 않고 고르게 줄 수 있다.
5 종이 테이프, 바인더 와이어, 네임픽, 케이블 타이(왼쪽부터) 작지만 활용도가 높은 소도구들. 식물 작업할 때 손이 자주 가는 제품이다.
6 쟁쇠 땅을 부드럽게 고를 때 사용하는 도구로, 사람의 힘으로 쓰는 쟁기 역할을 한다. 7 분갈이 삽 흙이나 마사를 퍼낼 때 사용한다.
8 헌터 장화 여러 장화 브랜드 중 가장 튼튼하다고 느낀다. 오래 신어 약간 닳았지만 작업 현장을 함께해온 기억이 있어 지금까지 잘 신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