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멀미에 어찔어찔한 봄, 열두 계절을 산다는 국립세종수목원의 전시원 실장으로 그를 만났다. 익히 눈여겨봐온, 꽃을 문화사와 과학사의 눈으로 읽어주는 〈식물의 위로〉 〈꽃을 공부합니다〉 〈나는 가드너입니다〉의 저자로서가 아니라. 열대 온실 속에서 그는 자기 삶의 내력, 한국 전통 정원, 인공지능을 박람하듯 말했다. 그런데 거기에서 ‘막’이라는 졸가리가 보였다.

20년 넘게 가드너로 살았다. 지금은 국립수목원에 소속되어 오니를 쳐내는 일부터 행정 문서 처리까지 그야말로 ‘백공百工’으로 산다. 줄기차게 책도 쓴다. 그걸 한데 묶는 키워드는 역시 ‘꽃’이다.
꽃은 지는 것을 아쉽다 하지 않는다. 다만 짙어지는 봄의 몫이라 할 뿐. 변화 앞에서 번뇌하는 건 오직 사람뿐이다.

최고 높이 32m, 총면적 9815.16㎡로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국립세종수목원의 사계절 전시 온실은 지중해 온실, 열대 온실, 특별 기획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5.5㎡의 관람자 덱길을 따라 나무고사리, 알스토니아, 보리수나무 등(총 438종 6724본)을 관찰할 수 있는 열대 온실이 백미.
“정원은 끝없이 변화하는 빛과 물, 공기의 흐름, 살아 있는 식물을 다루는 공간이에요. 그날 그날 ‘막’ 해야 하는 일이 가득해요. 날씨는 어느 하루도 똑같지 않아요. 식물의 잎과 꽃, 열매와 뿌리도 날마다, 해마다 달라요. 이렇게 변수로 가득한 환경에서 하나하나 세세히 살피며 식물에 필요한 일을 ‘막’ 해주다 보면 저마다 제때에 맞춰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웁니다.”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막’ 이야기를 막 꺼낼 줄이야. 그것도 이상 시대의 마지막 시인 같은 얼굴로. “특히 관록 있는 정원사는 변화무쌍한 상황 속에서 매일 최상의 결단을 내려 그때그때 꼭 필요한 일을 놓치지 않고 해내요. 마치 장인처럼. 대충 ‘막’ 넣고 버무리는데도 그 ‘대충’이라는 게 아무나 따라 할 수 없는 할머니 손맛과도 비슷하죠.”
어딘지 김초엽의 SF 소설 같은 풍경 속에서, 언젠가 세상의 ‘트러블’에서 지구를 구원해줄 것만 같은 온실 숲에서 국립수목원 소속 가드너가 ‘막’ 이야기를 한다. 나는 그 카드를 이 대화의 클라이맥스쯤 꺼낼 심산이었는데, 글렀다. 다행히도 그가 금세 국립세종수목원 전시원 실장이라는 본업으로 돌아간다. 사계절 전시 온실의 나무 설명에 열을 올린다. “타잔이 타고 다니는 줄이 다 이 열대식물 뿌리, 그러니까 공중 뿌리”라거나, “우리가 아카시아로 부르는 그 나무는 사실 아까시나무”라거나,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나무는 우리가 아는 그 보리수가 아니라 인도보리수나무”라거나…. 얼굴은 평화로운데, 어조는 자못 열띤 느낌이다. 홀린 듯 듣다 보니 어느새 이 수목원의 자랑인 열대 온실, 지중해 온실, 특별 전시 온실까지 훑었다.

국립세종수목원에는 26개의 주제원이 있다. 그곳의 테마를 기획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전시원실에서 한다. 전시 하나를 열려면 철거 공사부터 식재 공사, 연출물 같은 조형물 설치까지 전시원실 사람들의 '막 일'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제야 눈에 들어온 풍경이 있다. 몸을 엉큰 나뭇가지들, 누군가 쉬어가던 그루터기, 웃자란 잡초, 낙엽… 구도랄 것 없이 흩어져 있는데도 조화롭다. 보태거나 빼거나 위치를 바꾸면 안 될 것처럼. 완벽한 평화의 얼굴이다. 어쩌면 이 숲처럼 인생도 나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누군가 가져다 놓은 것들이 그 안에서 조화를 이룰 뿐인지도.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자연주의 정원은 이 ‘막’ 정신과 맞닿아 있다. 꽃이 피기 전과 지고 난 뒤 열매 맺는 모습까지 그대로 두고 즐기는 이 정원은 언뜻 보면 ‘막’ 만든 듯 불완전하고 미완성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모습에서 더 큰 편안함과 진정성을 느낀다. 정원의 본질은 완성품이 아니라 늘 변화하는 현재진행형의 살아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숲처럼 그의 인생도 그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어떤 정해진 노선이 있던 건 아니에요. 저를 이끄는 무언가를 계속 찾아가며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그래, 이게 내가 첫 대화로 기획한 그의 각별한 이력 이야기다. “서울대학교 원예학과를 나와서 출판사에 취직했어요. 꽃과 정원에 대한 책을 기획했는데, 거기서 비로소 내 전공 분야가 멋지고 확장성 있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죠. 학교에서는 시험 보고, 실험하기 바빴고, 농업 개념이 큰 전공이었으니까요. 그다음 직장인 가톨릭대학교 출판부에선 라틴어와 히브리어가 섞인 신학 잡지를 편집했어요. 한 3, 4년 정도. 그런데 뜻밖에도 거기서 정원에 대한 감각이 깊어졌어요.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는 가톨릭대학교 교정에 신부님, 수녀님들이 조용히 가꾸는 정원이 있거든요. 개인적인 신앙심하고도 연결된 건데, 그곳에서 뭐랄까 깨달음 같은 걸 얻었죠. 본격적으로 정원과 꽃에 관련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그 시기에 생겼고요. 결국 교직원이라는 안정된 직업을 내려놓고, 제주 여미지식물원에서 정원사 일을 시작했어요. 그곳에서 현장을 익혔죠. 4년 뒤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롱우드 가든으로 떠났어요. 더 체계적인 경험, 교육 시스템 같은 걸 배우고 싶었거든요. 어린 딸, 그리고 ‘지금이 기회다. 무조건 가야 된다’며 용기를 북돋는 아내를 제주에 남겨두고요. 1년간 국제 정원사 양성 과정을 이수하고도 2년을 더 머물렀어요. 델라웨어 대학교 롱우드 대학원에 진학했으니까요. 한 해 딱 다섯 명만 뽑는 공공 정원 리더 양성 프로그램을 이수했는데, 거기서 체계와 전문성을 배웠죠.”

우리나라의 국립수목원들은 전 세계 멸종 위기 식물 자원을 모으고, 서식지 밖에서 보호하는 역할도 담당한다. 사진은 국립세종수목원에서 수집, 연구, 전시 중인 17종의 박쥐란. 고사리의 일종으로, 큰 나무에 붙어서 자라며, 사슴뿔을 닮았다.
휴우, 강물처럼 쉼 없이 흐르는 이야기다. 잠깐 여울목을 둬야겠다. 그가 롱우드에서 보낸 사계절을 기록한 책 <나는 가드너입니다>에 이런 아름다운 문장이 있다. “고사리 정원… 그들이 선사시대와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마치 우리가 그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이 거쳐온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고 할까.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은 것이 절대로 복잡한 기교와 화려함이 아닌, 그들만의 단순하고 소박한 라이프스타일에서 기인한다는 것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고사리는 대부분 관리가 많이 필요하지 않고 병충해도 적은 편이라 다른 식물과도 잘 어우러진다.” 자! 다시 본래 물줄기로 합류한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에버랜드에서 식물 전시 연출가로 일했어요. 거기서 얻은 건 ‘So what?’이란 질문이었어요. ‘정원이 이렇게 좋아. 그런데 그걸로 So what? 사람들이 거기서 어떤 걸 얻어갈 수 있지?’ 그런 고민요. 다행히 에버랜드가 이벤트성이 가미된 어뮤즈먼트 파크여서 고민은 해결됐고요, 많은 실험을 했어요. 서서히 전 세계 가든 트렌드가 되고 있는 에디멘털 가든edimental garden(edible과 ornamental의 합성어로, 식용식물과 관상식물을 함께 배치하는 정원 개념) 같은 거라든지, 가을의 빨간색 식물만 모은 ‘레드 플라워 페스티벌’이라든지. 그리고 지금의 국립세종수목원이죠. 음… 진짜 정해진 경로는 없었어요. 예측할 수 없는 변화가 늘 제 앞에 있었고, 그때그때 필요한 일을 ‘막’ 했어요(서두에서 그가 한 말 “변수로 가득한 환경에서 하나하나 세세히 살피며 식물에 필요한 일을 ‘막’ 해주다 보면 저마다 제때에 맞춰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웁니다”를 복기하시라).”
세종시의 전월산 아래, 맹그로브·나무고사리·식충식물 따위로 가득한 열대 온실에서 들려준 이야기다. 그는 지금 산림 생물자원의 수집·보존·연구가 주목적인 이곳 국립세종수목원에서 ‘전시원 실장’이라는 직함으로 일한다. 전시를 통해 그 식물 자원을 국민에게 알리는 직무까지 더한 자리다. “출판 편집자의 기획력, 롱우드에서 배운 전문성, 에버랜드에서 익힌 대중과의 소통. 이 모든 게 연결되는 일”이란다. “특별전 하나 올리려면 철거 공사부터 식재 공사, 조형물 설치까지 다 하는 ‘막일’”을 “식물에 대한 열정 하나로 밀어붙이는 40여 명의 팀원”과 함께 한다. 그 노고 덕인지 작년에만 1백만 명 이상이 이곳을 다녀갔다. 여기까지가 고구마 캐내듯 캐물은 그의 삶의 내력이다.
커다란 바위가 막 구르다 멈춘 것처럼

물관과 체관을 지닌 최초의 육상식물로 불리는 나무고사리. 키가 10m까지 자란다.
자연의 섭리 속에선 정원수와 잡초, 관상용 꽃과 들꽃이 따로 있지 않다. 작약은 흐드러진 대로, 앵초는 수줍음 자체로, 복수초는 소박한 대로 우주만큼 경이롭다. 모두가 주연이다. “한국 전통 정원이 되게 어려워요. 전 세계 가드너들이 일본이나 중국 정원은 잘 아는데요, ‘한국 정원은 뭐야’ 물으면 명쾌하게 답하기가 쉽지 않아요. ‘막’의 철학을 품고 있다고 할까요? 서양 정원이 비례와 대칭, 원근법 같은 정밀한 계산의 결과물이라면, 우리 정원은 정해진 답 없이 주변과 조화롭도록 ‘막’ 빚어낸 거죠.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일부러 심은 건지 원래 있던 건지 구분하기 힘들어요. 보길도 윤선도 원림을 보면요, 마치 커다란 바위가 ‘막’ 구르다가 어느 순간 자연스레 멈춰 자리 잡은 것처럼 가장 적절한 자리에 정자가 무심히 툭 있어요. 언뜻 불완전하고 미완성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게 다 바둑의 한 수 한 수처럼 자연과 대화하며 절묘한 수를 둔 거거든요.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자연주의 정원도 이 ‘막’ 정신과 닿아 있는 것 같아요. 정원의 본질은 ‘완성품이 아니라 늘 변화하는 현재진행형의 존재’라는 걸 우린 미리 꿰뚫어본 거죠. K-가든의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고 할까요?”
곁가지로 뻗어나가다가도 이내 큰 줄기로 돌아올 줄 아는 사람의 ‘막’ 이야기다. 한데 인생 내력이든, 정원 이야기든, 전통 정원 이야기든 이 긴 서사는 끄트머리가 다 통한다. ‘정해진 답 없이’ ‘제때에 맞춰’ ‘자연스레’.
“가드너들에게도 AI와 로봇이 화두가 되고 있어요. 예산은 줄고 관리 면적은 늘어나니까요. 로봇 잔디 예초기, 전정 작업하는 트림봇, 센서로 정원 상태를 실시간 파악하는 시스템 같은 거로 이미 도움을 받고 있고요. 하지만 선은 분명히 있어요. 정원은 인간이 자기 욕구로, 즐거움을 누리려고 만든 공간이거든요. 일부러 풀 뽑고 땀 흘리면서 힐링하는 것처럼요. 정답이 없다는 것도 이유겠네요. 오롯이 지금 이 순간 내가 좋아하는 것, 빛과 물의 조건에 맞춰 내가 바꿔가는 공간이 정원이기 때문이죠. AI와 로봇에 획일화해서 맡길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거죠.” 쉼 없이 내달려 ‘정원 일을 로봇이 대체할 수 있을까?’라는 화두까지 다다랐다. 이제 <행복>의 디폴트값, ‘행복’에 대해 물을 차례다.
“어릴 적 우리 딸에게 정원이 뭐라고 생각하냐고 물은 적이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걷는 길’이라더군요. 인생이 하나의 탐험의 길이라 한다면 그 축소판이 정원 같아요. 다음엔 무슨 꽃이 있을까, 어떤 나무를 만나게 될까, 기대하고 발견하는 기쁨 말이죠.” 이 답도 딱 그만의 방식대로다. 그래서 안심이다. “꽃은 지는 것을 아쉽다 하지 않는다. 변화 앞에서 번뇌하는 건 오직 사람의 몫이다”라고 나는 저 앞에 썼다. 저 문장을 끌어다 놓는 것만큼 마침맞은 마무리가 또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거 하나다. 봄을 만끽하러, 숨이 가빠지게 번뇌하러 봄 숲에 가는 것!
국립세종수목원의 〈작당모의〉
작약과 모란의 아름다움을 만나는 특별한 전시
기간 5월 31일(일)까지
장소 국립세종수목원 한국전통정원과 분재전시관
문의 044-251-0001
접두사 ‘막’에는 서툴고 투박하지만 일단 해보는 한국인의 기질과 태도, 정신, 용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 기질이 어떤 감각과 만날 때, 남다른 디자인과 예술로 확장되고 벤처 정신이 돋아납니다. ‘막, 크리에이티브!’를 디자인하우스의 50주년 기념 문화 캠페인으로 삼은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