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속 건축은 때로 하나의 풍경처럼 존재한다. 스위스 멘드리시오에서 건축가 알도 첼로리아는 공간과 재료, 빛의 관계를 탐구하며 사유할 수 있는 집을 완성했다.

거실 공간. 콘크리트 지붕은 네 개의 주변 블록 위에 놓여 있고, 나머지 면은 전면 유리로 열려 있어 숲을 3백60도로 바라볼 수 있다. 중앙에는 리빙디바니Living Divani의 소파, 오른쪽에는 놀Knoll의 버터플라이 체어, 스토리카Storica SA의 붉은 베르베르 울 러그, 플로스Flos의 루미네이터 플로어 램프가 놓여 있다.
“콘크리트는 조용하고 절제된 재료지만, 빛과 그림자를 받아들이면 깊은 표정을 만들어냅니다. 여기에 보르도색을 더하면 공간은 구조를 넘어 감정과 이야기를 품은 장소가 됩니다.”
스위스 남부 티치노 지역의 작은 도시 멘드리시오Mendrisio. 마을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알레 칸티네Alle Cantine 구역에는 숲으로 이어지는 좁은 흙길이 하나 있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바위 절벽 아래, 조용히 자리 잡은 집 한 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한때 첼로리아 가족의 오래된 와인 저장고가 있던 자리다. 지금은 건축가 첼로리아가 아들 에바Eva와 딸 니콜라Nicola와 함께 살아가는 보금자리로 새롭게 쓰고 있다. 콘크리트로 지은 건물은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인다. 숲과 암벽 사이에 자리한 이 집은 주변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며, 자연과 건축의 경계를 부드럽게 흐린다.

벽난로와 함께 집 전체에 반복되는 굽은 아치 형태가 마치 무대배경 같은 효과를 낸다. 벽난로 위에는 아르투르 루이스 피자Arthur Luiz Piza의 작품이 걸려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스튜디오 첼로리아Studio Celoria의 사이드 테이블과 라보라토리 밀라노Laboratory Milano의 히드리아 대리석 화병이 놓여 있다.
첼로리아는 지역에 대한 깊은 이해와 국제적 시각을 함께 지닌 건축가다. 스위스와 아르헨티나에서 공부하며 페터 춤토어Peter Zumthor와 마리오 보타Mario Botta의 작업을 가까이에서 접했고, 건축 이론가 케네스 프램프턴Kenneth Frampton의 지도 아래 학업을 마쳤다. 이후 아르헨티나 건축가 클로린도 테스타Clorindo Testa와 협업하며 자신의 건축 언어를 한층 확장해왔다. 그의 작업은 시적 감각과 구조적 명료함이 어우러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곳은 유리와 콘크리트를 함께 사용한 구조로, 건물이 마치 바위 지형과 겹쳐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건축가는 이 공간의 출발점을 ‘동굴의 원형(archetype)’에서 찾았다고 말한다. 동굴은 가장 오래된 보호의 장소이자 사색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두껍게 드러난 콘크리트 질감과 깊게 드리운 그림자는 자연 속 동굴을 떠올리게 하고, 그 사이로 들어오는 빛은 서서히 스며들듯 공간을 채운다. “동굴은 인간이 처음 머무르던 가장 원초적 공간입니다. 저는 그 공간이 지닌 보호의 감각과 침묵, 그리고 빛이 스며드는 방식에 늘 매료되어왔지요. 이 집은 그런 기억을 현대건축의 언어로 다시 풀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앙에는 리빙디바니의 엑스트라소프트 소파 아일랜드와 엘리티스 장식 쿠션이 놓여 있다. 왼쪽에는 1층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이 보인다.
아치로 열린 콘크리트 풍경
건물은 코너 네 개에 배치한 덩어리형 공간으로 구조가 짜여 있다. 그 안에 팬트리와 옷장, 욕실 같은 보조 공간이 들어가 있어 중앙은 하나의 넓고 열린 공간으로 남는다. 콘크리트와 유리, 그리고 빛이 만들어내는 이 공간에서 일상의 움직임은 막힘없이 이어진다. 일반적으로 브루털리즘 건축이 보여주는 차갑고 단단한 덩어리감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다. 이 집에서는 곡선으로 흐르는 벽과 유연한 공간 구성이 어우러지며, 공간 전체에 부드러운 리듬과 생동감을 만든다. 공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요소는 부드럽게 휜 아치 형태의 벽이다. 돌로 만든 커튼처럼 서 있는 이 구조는 빛과 그림자, 채움과 비움의 경계를 만들어낸다. 공간을 가르면서도 동시에 이어주는 장치로, 집 전체를 상징하는 형태이기도 하다.

1층 현관에서 바라본 다이닝 공간. 모든 개구부에 반복되는 굽은 아치 형태는 이 집의 디자인 아이콘으로, 빛과 그림자 및 채움과 비움의 경계를 만드는 돌 문턱처럼 작동한다. 스튜디오 첼로리아가 디자인한 목재와 스틸 소재의 다이닝 테이블 위에는 라보라토리 밀라노의 변형 가능한 화병 컬렉션과 엘리아나 델라 스피나의 라쿠 세라믹 접시가 놓여 있다. 주변에는 1950년대 빈티지 미드센추리 T 체어 네 점이 배치되었으며, 천장에는 테르차니Terzani의 미주 블로운 글라스 펜던트 조명이 설치되었다.
실내의 기본 분위기는 콘크리트가 만든 차분한 회색 톤이 중심을 이룬다. 여기에 목재 요소가 더해지면서 색감이 등장한다. 문과 주방, 계단, 욕실에는 깊은 보르도bordeaux(짙은 적자색)색을 사용했는데, 무어와 마그레브 문화에서 영감을 받은 색채다. “콘크리트는 조용하고 절제된 재료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빛과 그림자를 받아들이는 깊은 표정이 있지요. 그 위에 보르도색을 더하면 공간은 단순한 구조를 넘어 하나의 감정과 이야기를 품은 장소로 변합니다.” 입구에서 이어지는 이 공간은 집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에 놓인 일종의 문턱 같은 곳으로, 식사와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생활의 중심이다. 이곳에는 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다. 하나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큰 테이블이고, 다른 하나는 가족의 일상을 위한 작은 테이블이다. 스튜디오 첼로리아가 디자인한 테이블과 1950년대 빈티지 T 체어가 함께 놓이며 차분하고 절제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공간 곳곳에는 도자 작가 엘리아나 델라 스피나Eliana della Spina의 라쿠 세라믹 화병과 컬러 유리, 대리석으로 만든 모듈 오브제가 놓여 있고, 벽에는 영국 아티스트 데이비드 트렘릿David Tremlett의 그래픽 작품이 걸려 있다. 주방은 코메텍스 스위스Cometecs Suisse가 설계한 것으로, 단순한 선과 보르도색의 단색 표면이 하나의 조각처럼 공간의 중심을 잡는다.

아늑하고 편안한 욕실 공간. 하맘처럼 바닥에 매입한 콘크리트 욕조가 몸을 담그도록 유도하고, 일부 기능적·장식적 요소는 벽 안으로 매입했다. 벽에는 텔레리에 스파다리 밀라노Telerie Spadari Milano의 허니콤 직조 목욕 가운이 걸려 있고, 바닥에는 스토리카 SA의 테두리가 대비되는 오리엔탈 러그가 놓여 있다.

계단 공간 디테일. 보르도 에나멜 마감 목재로 만든 나선형 구조가 특징이다.
계단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침실이 있는 공간이 펼쳐진다. 그 사이에는 미로의 중심처럼 비어 있는 공간이 하나 있다. 어느 문을 열지 잠시 멈춰 생각하게 만드는, 다소 추상적인 장소다. 침실은 최소한의 가구와 단순한 형태로 구성했다. 자연광은 커튼을 거쳐 부드럽게 들어오며 풍경과 실내를 자연스럽게 이어준다. 공간의 색은 앤트러사이트(짙은 흑회색), 토프taupe(회갈색), 오커ochre(황토색), 같은 자연색을 기본으로 하고, 러그와 문에서 다시 보르도색이 포인트처럼 등장한다. 욕실은 조용한 하맘hammam(중동·터키식 공중목욕탕)을 떠올리게 하는 분위기다. 바닥에 낮게 자리한 욕조와 벽을 파낸 니치, 매트한 콘크리트 표면이 어우러지며 물과 빛이 만드는 차분하고 명상적인 공간을 완성한다.

알도 첼로리아와 아들 에바, 딸 니콜라.
“욕실을 단순한 기능 공간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물과 빛, 그리고 재료가 만나는 순간이 하나의 의식처럼 느껴지는 장소가 되기를 바랐죠. 그래서 이 공간은 최대한 조용하고 밀도 있게 설계했습니다.” 집의 맨 위층은 건축가가 ‘꿈의 공간’이라 부르는 곳이다. 사방으로 숲을 바라보는 3백60도의 거실이 펼쳐진다. 지붕은 주변 구조점 네 개가 지지하고, 콘크리트 형태는 모두 중앙의 천창으로 모여든다. 그곳에서 떨어지는 빛은 공간을 거의 성소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한쪽에는 구조와 하나처럼 이어진 벽난로가 자리하고, 거실 중앙에는 깊이감 있는 소파가 놓여 있다. 주변에는 슬림한 플로어 조명과 간결한 스툴, 그리고 가벼운 라운지체어가 더해져 절제된 풍경을 완성한다.

큰 창을 향해 배치한 책 읽는 자리.

건물 외관과 현관 전경. 철근콘크리트 덩어리가 땅에서 솟아오른 듯한 형태로, 세 개의 층이 지형과 시각적·물리적으로 연결된다.
유리창 너머로는 계절에 따라 표정을 바꾸는 숲이 펼쳐진다. 봄에는 연둣빛 잎이 창을 가득 채우고, 여름에는 짙은 녹음이 집 주변을 감싼다.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붉거나 황금빛으로 물들며 풍경의 색을 바꾸고, 겨울에는 잎이 떨어진 나무의 실루엣만 남아 건축 형태와 더욱 또렷하게 겹쳐진다. “건축은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 대상이기보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많은 것을 보여주는 존재여야 합니다. 오래 바라볼수록 새로운 표정이 드러나는 풍경 같은 건축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 집에서 건축은 자연을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 숲과 바위 사이에 조용히 머물며 그 풍경과 시간을 함께 견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