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리카 카발리니는 이탈리아 패션 디자이너로, 2009년 동명의 여성복 브랜드를 론칭했다. 라임 옐로 셔츠와 머스터드 톤 힐을 매치한 채 시멘트 계단에 선 모습처럼, 메이드 인 이탈리아 수공예와 테일러링 디테일을 바탕으로 한 절제된 우아함은 세미 쿠튀르라는 이름으로도 읽힌다.
이탈리아 모데나Modena 구도심, 붉은 테라코타 지붕들이 겹겹이 내려다보이는 오래된 건물 3층, 오랜 시간의 결 위로 정제된 미감이 우아하게 내려앉은 집이 자리한다. 1990년대부터 밀라노 패션계에서 활약하며 세미쿠튀르semi-couture와 자신의 이름을 내건 하이엔드 브랜드 ‘에리카 카발리니Erika Cavallini’를 이끌던 디자이너 에리카 카발리니의 사적 안식처다. 브랜드를 이끌며 런웨이 쇼를 올리고, 밀라노의 프레스티지 쇼핑 구역인 콰드릴라테로Quadrilatero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 때부터 그에게 공간은 옷만큼이나 중요한 언어였다. 매장의 톤을 조율하고 가구 하나, 퍼니싱 액세서리 하나까지 세심하게 고르던 감각은 2019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에서 물러난 뒤, 비로소 자신의 삶을 위한 집으로 온전히 수렴되었다.

자연광이 스며드는 거실에 라탄 체어와 나무 가구가 차분하게 어울린다. 벽면에는 마리오 벨리니의 B&B 이탈리아 카멜레온다 소파와 스칸디나비아 빈티지 사이드보드를 두어 공간의 중심을 만들었다.
“팬데믹을 겪으며 생활과 업무를 아우를 수 있는 더 편안하고 기능적 공간이 절실해졌어요. 인테리어디자인과 가구에 대한 오랜 애정이 자연스럽게 저를 이곳으로 이끌었죠.” 그의 말처럼 약 170㎡ 규모의 이 집은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다. 패션 논리로 구축한 ‘생활의 무대’이자, 수집과 리서치로 축적해온 그만의 취향이 집대성된 아카이브다.

두 개의 빈티지 라탄 암체어와 낮은 목재 커피 테이블을 마주한다. 이곳에 앉아 커피 타임을 즐긴다. 뒤편으로 시멘트 계단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패션 룩을 입듯 공간을 입히다
현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감각을 깨우는 것은 ‘색’이다. 카발리니는 집의 팔레트를 짤 때도 패션 룩을 스타일링하듯 접근했다. “밀짚을 연상케 하는 따스한 스트로 옐로straw yellow와 부드러운 아이스크림 톤, 그윽한 커피색 같은 웜 톤 계열에 차가운 시멘트 그레이cement grey를 섞었어요. 여기에 아주 미묘한 피치 핑크peach pink를 더해 전형적이지 않은 조합을 시도했죠.” 그의 설명대로 집 안 곳곳에 펼쳐진 더스티dusty한 색감은 공간을 몽환적이면서도 차분하게 감싼다. 과장된 원색 대신 톤 다운된 색채가 서로 스며들면서 여성적이되 우아한 인상을 남긴다. 특히 침실은 이러한 컬러 철학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과감한 투톤 핑크를 배합해 ‘색채의 서정성’을 극대화했다. 공간 중심에는 피앙카Pianca의 트라마 레뇨Trama Legno 침대를 두고, 벽면에는 세르주 무이Serge Mouille의 월 램프를 설치했다. 부드러운 핑크빛 색면 위로 램프의 검고 긴 선이 드리워지면서 공간에 기분 좋은 조형적 긴장감을 만든다.

목재·알루미늄 소재의 빈티지 매거진 랙.

에리카가 소유한 패션 아이템 또한 공간의 분위기와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다.
이 집의 레노베이션은 욕실 한쪽 벽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특별한 보석’이라 부르는 욕실 파티션은 1956년 장 프루베Jean Prouvé가 프랑스 베지에Béziers의 학교 파사드를 위해 디자인한 알루미늄 선셰이드 패널이다. “프랑스의 앤티크 딜러를 통해 오리지널 패널 두 장을 구했어요.

거실은 에리카의 또 다른 쉼의 공간이다. 빈티지 가구와 오브제가 한데 어우러져 이곳만의 차분한 풍경을 만든다.
그 패널이 도착한 순간이 바로 변화를 시작하는 신호였습니다. 이 집의 전면적 레노베이션이 거기서부터 출발했으니까요.” 장식 대신 구조와 물성에 집중하는 프루베의 태도는 집 전체의 기준점이 됐다. 목공과 타일로 짠 간결한 세면대 위로 빈티지 거울과 네모Nemo의 램프 드 마르세유Lampe de Marseille 벽등이 어우러진 장면은 그가 동경해온 프랑스 합리주의 디자인과 1960년대 이탈리아 부르주아 미학이 한 공간에서 맞물리며 완성한 조형미를 보여준다.

1960년대 M.I.M.을 위해 이코 파리시가 디자인한 파란 벨벳 암체어 두 점과 튤립 커피 테이블.
소재를 대하는 그의 기준은 주방에서도 이어진다. 그는 주방 가구 마감재로 발크로마트Valchromat를 선택했다. “발크로마트는 소박해 보이지만 성능이 뛰어나고, 열과 물에 대한 저항성이 탁월한 소재예요. 마치 옷의 원단을 고를 때 텍스처뿐 아니라, 기능과 핏을 동시에 읽어내는 것과 같죠.” 여기에 브러시드 스테인리스 백스플래시를 더해 빈티지 접이식 다이닝 테이블과 현대적 주방 가구 사이의 시각적 균형을 맞췄다.

빈티지 목재 테이블 주위로 1960년대 아르네 야콥센이 디자인한 프리츠 한센 해머 티크 체어 세트가 놓여 있다. 위에는 미드센추리 티크 펜던트가 공간을 부드럽게 밝힌다.
수집은 전시가 아닌 생활이다
거실은 빈티지와 동시대적 감각이 가장 뚜렷하게 교차하는 무대다. 공간의 중심에는 마리오 벨리니Mario Bellini가 B&B 이탈리아를 위해 1970년대에 디자인한 걸작 카말레온다Camaleonda 소파가 놓여 있고, 그 뒤로 묵직한 스칸디나비아 빈티지 사이드보드가 배경을 이룬다.

욕실은 알루미늄 차양 패널이 중심을 이룬다. 1956년 장 프루베가 제작한 것이다.
흥미로운 장면은 그 옆에 놓인 선반이다. 시멘트 블록과 대리석 판을 무심히 쌓아 올린 임시 구조물(improvisational structure) 위에는 그가 스튜디오 페페Studio Pepe와 협업해 선보인 ‘인트로Intro’ 프로젝트의 대리석 오브제들이 놓여 있다. 패션에서 다뤄온 물성을 돌(stone)로 치환하던 그의 커리어가 집 안에서 오브제로 구현된것 이다. 바닥에는 폴스포턴Polspotten의 스툴을 두고, 우드와 알루미늄 소재의 빈티지 매거진 랙을 곁들여 소파의 풍성한 볼륨과 수집의 결을 한 흐름으로 이어준다.

콘크리트 블록 위에 대리석 판을 얹어 즉흥적으로 만든 선반에는 에리카의 인트로 컬렉션 작품 두 점이 놓여 있다.
집 아래층의 스튜디오는 그가 왜 ‘수집가’로 불리는지 증명하는 공간이다. 작업실이라기보다 빈티지 퍼니처 갤러리에 가깝다. 이코 파리시Ico Parisi가 엠아이엠M.I.M.을 위해 만든 1960년대 블루 벨벳 암체어 두 점, 오스발도 보르사니Osvaldo Borsani가 테크노Tecno를 위해 디자인한 D70 소파 베드, 아르네 야콥센Arne Jacobsen의 티크 우드 해머Hammer 체어 등 디자인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가구들이 즐비하다.

투톤 컬러 스킴이 만든 핑크의 우아함이 돋보이는 침실.
“가구는 제게 ‘수집’의 결과이자 광범위한 리서치의 총합입니다. 경매를 찾아다니고, 온라인 디자인 숍을 뒤지고, 모던 앤티크 페어를 다니며 거기에 제 디자인 감각까지 섞었죠.” 하지만 이 가구들은 박제된 전시품이 아니다. 서로 다른 시대의 오브제들이 생활 동선에 따라 자연스럽게 놓인 풍경은 이 집이 저장고가 아니라 매일의 경험 속에서 취향이 갱신되는 ‘현장’임을 보여준다. 층과 층을 잇는 노출 콘크리트 캔틸레버 계단 아래에는 핸드백 컬렉션이 무심한 듯 자리하고, 그 곁에는 1960년대 올라프 폰 보어Olaf von Bohr의 메두사Medusa 램프가 빛을 밝힌다.

브러시드 스테인리스 백스플래시를 갖춘 맞춤형 주방은 빈티지 접이식 다이닝 테이블 및 의자와 균형을 이루며 공간에 현대적 터치를 더한다.

집의 아래층에는 에리카의 스튜디오가 자리한다. 더스티한 그레이 톤의 배경과 딥 블루 컬러 벽이 거실과는 다른 분위기를 만든다.
최상층으로 올라가면 모데나의 지붕 너머로 시야가 시원하게 열리는 루프톱 테라스가 나타난다. 그는 그곳에 ‘도시 한복판에서 별 아래 잠들기 위한’ 침실을 마련했다. 오래된 목재 천장과 보(beam)를 그대로 드러내 건물의 시간을 존중하면서, 그 안을 자신만의 색과 가구로 채운 모데나의 집. 이는 단순한 패션 디자이너의 공간이 아니다. 옷을 만들던 섬세한 손길로 공간의 결을 다듬고, 수집한 물건에 삶의 서사를 부여해 완성한, 에리카 카발리니라는 사람 자체를 닮은 가장 진실된 예술 작품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