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정

윤여정은 꼿꼿한 자세와 중심에서 뿜어져 나오는 품위를 지닌 사람이다. 냉소와 재치로, 때론 무표정한 다정으로 자신을 바로 세우는 그녀는 결코 ‘한국의 어머니상’ 같은 모습이 아니다. 백발의 머리를 염색하지 않고 주름을 가리지 않는데도 그렇다. 그 누가 아무리 치켜세운다고 해도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까다로운 성미에 직설적 말투, 지적인 유머를 구사하는 그녀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미니멀한 옷을 걸친다. 재킷을 즐겨 입고 종종 데님도 입는다. 흐르는 듯한 실루엣의 리넨 셔츠와 원피스도 그녀가 좋아하는 아이템. 액세서리는 그저 아이웨어를 올리거나 링 하나를 심플하게 끼는 정도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어떤가? 테일러링한 듯 세심한 핏의 의상을 선호하는 그녀는 단정과 품위를 잃지 않되, 지나치게 드레스업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녀의 패션 문법이다.
그녀가 쌓아온 커리어와 삶엔 가파른 질곡도 휘황한 휘광도 있었다. 故 김기영 감독의 <화녀>와 <충녀> 속 치명적인 팜 파탈로 스크린에 화려하게 등장한 그녀는 결혼과 미국 이주로 한동안 자취를 감췄다. 이혼 후 1990년대 국민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등에서 히스테리와 유머가 묻어나는 생활 연기로 화려하게 배우 인생 2막을 열었고, 이후 <바람난 가족>의 욕망에 사로잡힌 시어머니, <죽여주는 여자>의 노년의 성 노동자, <미나리>의 이민자 가정의 시어머니, <파친코>의 모진 역경을 겪어낸 순자, 나아가 퀴어 커플의 위장 결혼을 그린 미국 영화 <결혼피로연>의 어머니까지 다이내믹하고 모던한 여성의 얼굴을 보여줬다. 한편 아들이 퀴어 당사자임도 거리낌없이 밝혔다. 배우로서든 인간으로서든 윤여정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동시성. 언제나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간 미래에 도착해 있는 윤여정은 내가 아는 가장 젊은 노년의 얼굴이다.
박찬욱

영화감독 박찬욱에게 스타일이란 곧 세계관이다. <복수는 나의 것>부터 <어쩔수가없다>까지, 그가 만들어낸 영화엔 선명한 인장이 새겨진다. 박찬욱을 논하며 우리는 ‘스타일’이라는 것이 미적인 것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단순히 스크린에 가시적으로 보이는 미장센(미술과 소품, 화면의 사이즈와 빛, 배우의 얼굴과 표정, 의상과 헤어· 메이크업의 총체)만을 영화의 ‘스타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박찬욱이 그간의 작품을 통해 거듭 말하고자 하는 삶의 역설과 모순일 수도 있고, 불쾌하고도 발작적인 유머일 수도 있으며,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정념과 정동情動일 수도 있다.
박찬욱 본인은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그는 자신이 만드는 영화를 닮았다. 그가 젊은 시절 신랄하게 쓴 영화 비평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시니컬하면서도 은근한 유머가 있는 문체, 그가 나이 들어가며 찍은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정적이고 점잖으면서도 일순 드러나버리고 마는 탐미, 한국의 강력계 형사 사무실마저도 아름답게 만들어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심미안과 더불어 구스타프 말러의 엄청난 애호가인 것도 어쩔 수 없이 그의 아비튀스habitus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과거 인터뷰에서 그는 “영화에 대해 논할 때는 ‘이 영화의 주제는 뭐지’보다 ‘그 커피잔은 무슨 색이지’가 괜찮은 시작이지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공식적 자리에 나타난 박찬욱을 떠올려본다. 그는 슈트가 근사하게 잘 어울리는 중년 남성이지만, 슈트 셋업뿐 아니라 가죽 트렌치코트, 메탈 소재의 가벼운 아이웨어도 자주 착용한다. 대체로 점잖고 격식 있다. 그런데 언젠가는 그가 인터뷰 자리에 올 블랙 착장에 녹색 가죽 장갑을 착용하고 나타났다. 온통 검은 와중에 삐죽 드러난 녹색이 꽤나 야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아끼는 장갑이라고 했다. 나는 이것이 박찬욱이구나, 느꼈다.
백현진

백현진을 지질한 ‘영포티’ 캐릭터 전문 배우로만 알았다고? 물론 그것도 맞다. 하지만 백현진은 삶이 곧 태도인 멀티플레이어다.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전방위적이고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한 인물은 한국에서 그가 유일하다. ‘어어부프로젝트’ ‘방백’의 멤버이자 솔로로 활동하는 싱어송라이터, 페인팅· 비디오·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작업을 펼쳐 보이는 아티스트, 그리고 당신도 알다시피 영화 <북촌방향> <경주> <브로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과 시리즈 <지옥> <무빙>, 드라마 <모범택시> 등에서 지질하면서도 궁상맞고 때론 악랄하고 뻔뻔한 얼굴을 보여주는 독보적 캐릭터를 지닌 배우다.
초현실적인 시 같기도, 걸쭉한 민요 같기도 한 그의 노래는 장르를 변칙적으로 넘나들며, 프로듀서이자 믹싱 엔지니어로서 ‘소리’에 천착한다. 지난해 솔로 앨범 <서울식>을 발매하며 1995년 홍대에서 첫 공연을 한 후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겪어낸 도시를 ‘들리는 서울’로 표현한 그는 올해엔 2월 4일부터 3월 21일까지 PKM갤러리에서 개인전 를 열며 ‘보이는 서울’을 페인팅, 비디오 등 다양한 매체로 제시한다. 그의 아트는 색채와 도형, 선과 패턴이 리드미컬하게 공명한다. 그의 음악처럼 자유롭다.
농담과 진담을 오가며, 기술과 감각 사이를 유영하고, 숙고와 즉흥을 넘나드는 아티스트. 그런 백현진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것은 오래 입어 바랜 듯한 두툼한 워크 셔츠, 오버 핏의 데님 팬츠, 헝클어진 머리, 동그란 안경, 깔끔하게 면도하지 않아 푸릇푸릇한 수염 자국이 남은 인중 같은 것. 그는 억지로 ‘영’포티처럼 갖춰 입거나 그루밍하지 않아도, 내가 아는 쉰셋 중 가장 젊다. 그렇기에 그는 사우나를 배경으로 목욕 가운만 걸치고 아식스를 신어도 설득이 되는 사람이다. 이토록 자유분방하게 나이 든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무대에 선 백현진은 세션의 박자가 어긋나면 씩 웃고 휘파람을 분다.
제니

제니는 제니다. 고유명사, 제니 루비 제인, 세상에 단 하나뿐인, 아이콘, K-팝 아이돌로서 누구도 가보지 못한 자리에 앉은, 이제는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제니. 그녀에 대해 말한다면 YG에서 독립해 나오면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맞다. 그때부터가 진정한 제니의 기원이 될 테니까.
개인 레이블 오드 아뜰리에를 설립한 제니는 세계 여자아이의 날에 “‘클라이드’ 없이 잘 도망치는 ‘보니’”들에 대해 노래한 첫 싱글 ‘Mantra’를 발표한다. 뒤이어 발표한, 스스로 프로듀싱한 첫 정규 앨범 . 그녀의 두 번째 이름이자 새빨간 루비를 연상케 하는 압도적 비주얼 콘셉트, 귀에 꽂히는 훅과 주술적 리듬과 더불어 거의 모든 곡에 19금 딱지를 박아버린 과감함, “여자들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선언으로 시작해 ‘ZEN(선)’이라는 각성에 이르기까지 여성 영웅 탄생 서사에 가까운 트랙들, FKJ와 두아 리파 등 강력한 피처링 라인업까지 명반의 자리에 오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만이, 그리고 그 이상의 가능성을 보는 사람만이 이런 작업을 해낼 수 있다. 제니는 이미 세계적 스타가 되었음에도 자신이 한국인임을 잊지 않았고, 계속해서 한국 전통복과 소품에서 모티프를 얻은 미학적 요소를 계속 활용한다. 그리고 여성으로서 목소리 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샤넬은 일찌감치 그녀를 알아보았고, 오랜 시간 브랜드의 얼굴로 삼았다. 2025년 멧 갈라의 주제는 ‘Tailored for You’. 남성복에서 영감을 받아 컬렉션을 펼친 코코 샤넬의 유산을 모던하게 재해석한 룩을 보라. 블랙 포크 파이 해트를 쓰고 새틴 점프슈트를 입은 제니는 이날의 주인공이었다. 자기가 어떤 걸 할 수 있고, 또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정확하게 아는 제니. 그녀는 스타일이 곧 태도고 태도가 곧 스타일임을 보여주는, 바로 지금의 아이콘이다.
정재형

정재형은 옷을 잘 입는다. 그의 스타일은 파리에서 막 귀국한 듯 프렌치 자체. 단정한 뿔테안경에 목선을 덮는 정도의 헤어 기장을 선호하는 그는 셔츠에 니트를 숄처럼 두르고, 쇼츠에 니삭스를 신고, 로퍼를 신는다. 가끔은 베레 같은 모자도 쓰고 보타이 같은 액세서리도 착용한다. 나이가 몇이든 어디에 살고 있든 그가 지향하는 바가 곧 그임을 알게 해주는 차림이다.
스타일에는 그 사람의 기원이 있다. 1995년 팝 발라드 그룹 베이시스로 데뷔한 정재형은 우아한 멜로디에 서정이 묻어난 곡들을 선보였고, 솔로로 활동하며 파리에 음악 유학을 다녀온 후 그 색채는 더욱 강해졌다. 한국식 발라드 문법에 클래식 화성과 오케스트레이션을 곁들이고, 심지어 오케스트라를 직접 지휘하기도 한다. 연주곡 앨범 <프롬나드, 느리게 걷다>나 피아노 연주 앨범 를 가만히 들어보면 그가 풍부한 화성과 깊은 서정을 정제된 형태로 담아내는 걸 좋아하는 뮤지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정재형이 직접 쓰고 그린 에세이 <정재형의 Paris Talk 자클린 오늘은 잠들어라>를 곁들여 읽으면 파리는 ‘걷는 도시’라는 걸, 그만큼의 속도로 천천히 거리와 일상 구석구석을 살피고 자그마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곳이란 것이 느껴진다.
그의 낭만적이면서도 위트 있는 캐릭터는 예능에서도 빛을 발했다. 일찍이 <무한도전>에서 예능 캐릭터로 주목받은 그는 격식 있고 까다로운 뮤지션이면서도 ‘허당미’가 있는 모습과 우아하면서도 세심한 잔소리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유튜브 채널 ‘요정재형’에서는 당사자도 모르는 사이에 게스트의 마음을 열어버리는 적당한 매너와 적당한 온도의 태도로 젊은 세대 위주의 새로운 팬덤을 형성하는 중이다. 그의 음악과 캐릭터, 그리고 스타일링은 닮았다. 격식 있으면서도 편안하고, 낭만적이면서도 단정하다. 쉰여섯의 나이에도 쇼츠에 니삭스를 신는 것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스타일링인지 납득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전히 정재형을 보며 프렌치 룩과 화성음악의 풍부함을, 사람을 대하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온화한 태도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는 것이다.
박정민

개성파 배우, 산문집 <쓸 만한 인간>의 작가, “넷플릭스 왜 보나 성해나 보면 되는데”라는 도발적인 추천사로 한 권의 책을 베스트셀러로 등극시킨 출판계의 아이돌, 출판사 무제의 대표, 영화 시상식 공연에서 뒷짐 진 채 가수 화사의 리듬에 맞춰 고개를 여유롭게 까딱인 것만으로도 ‘여심 저격’ 버즈를 일으킨 남자, 침착맨 유튜브와 게임 스트리밍 방송을 보는 오타쿠. 총체적으로 날것이고 또 지적인 인간 박정민 얘기다.
돌이켜보면 데뷔작 <파수꾼>부터 박정민은 이상한 배우였다. 그는 영화 내내 알 듯 모를 듯 한 부루퉁한 얼굴을 하고선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동시에 애정을 갈구하는 친구를 밀어낸다. 불쌍해서라도 혹은 맞기 싫어서라도 곁을 내줄 법도 한데,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아도 꿋꿋하다. 박정민이 연기한 ‘희준’에게선 기이한 신비마저 느껴진다. 전형적 연기를 하거나 미남 배우가 ‘희준’을 맡았더라면 결코 그런 분위기를 자아내지 않으리라. 이후 박정민은 영화감독이 사랑하는 배우가 된다. 이준익 감독 <변산>의 지질한 래퍼, 류승완 감독 <밀수>의 잔혹하지만 인간적이라 웃긴 악역, 박찬욱 감독 <헤어질 결심>의 막 사는 인생이지만 사랑만큼은 진심인 남자, 연상호 감독 <얼굴>의 취약해서 더 추악한 주인공까지 생생한 연기를 한다. 삐죽 솟는 짙은 눈썹과 관조하는 눈빛, 약간 휜 콧대와 두툼한 입술까지 날것의 육체성이 그대로 느껴지는 신체, 전형성에서 벗어난 연기로서 말이다.
배우라는 오라 뒤에 숨지 않는 박정민은 문학이라는 상위 장르와 게임과 인터넷 방송이라는 하위 장르를 오가며 그저 자신의 것을 펼친다. 배우이며 작가이며 출판사 대표이며 오타쿠이며 남자인 모습 그대로. 그는 늘 약간 구부정한 자세를 하고, 머리를 대충 만지고, 뿔테 안경을 쓰고, 두꺼운 책이 들어갈 것 같은 에코백을 멘다. 로고 플레이 없는 무채색 옷을 입고 별다른 장식도 하지 않는다. 공식 석상에서도 별스럽게 꾸미지 않는다. 그냥 자기 자신이, 박정민이 되는 것에 그는 꺼려함이 없다. 박정민을 우리 곁의 인간으로, 머릿속이 궁금해지는 작가로, 자꾸 보고 싶은 개성적 배우로 만드는 단순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