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닫이' 시리즈와 정구호 작가. 그는 아트테인먼트 복합 리조트 파라다이스시티 내에 자리한 아트 스페이스, 그리움 미술관 레노베이션 등도 진행했다.
런던 세인트제임스의 제민 스트리트에 자리한 슬래드모어 갤러리는 1965년 설립한 이후 줄곧 조각이라는 단일 매체에 집중해온 보기 드문 갤러리다. 로댕과 드가, 렘브란트 부가티로 이어지는 19세기 후반 및 20세기 초 조각의 계보부터 닉 피디언-그린과 마크 코레스 같은 동시대 작가에 이르기까지, 인체와 동물 조각을 중심으로 한 명확한 미학적 축을 유지해왔다. 매년 연말 열리는 은 이러한 슬래드모어의 성격을 가장 응축해 보여주는 자리로, 현재 갤러리가 주목하는 현대 조각가들의 소형·중형 브론즈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그룹전으로 구성된다. 2025년 12월 1일부터 23일까지 열린 이번 전시에도 세계 각국에서 온 조각가의 작품이 자리를 빛냈다.

Kuho Jung, 'Chrysanthemum-Patterned Bandaji', plexi glass, brass,70x66x40cm, 2022. Courtesy of the artist, Photo: Grid
Q 주요 현대 조각가를 소개하는 슬래드모어 갤러리 연례전에 참여하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A 더 페이지 갤러리와 인연을 맺으면서 자연스럽게 이어진 기회였습니다. 갤러리 측과 글로벌 시장에서의 가능성을 다각도로 모색하던 중, 조각을 전문으로 다루는 슬래드모어 갤러리에서 먼저 협업을 제안해왔습니다. 그 흐름 속에서 크리스마스 기획전에 합류하게 되었죠. 제프리 대시우드Geoffrey Dashwood, 마리오 딜리츠Mario Dilitz 다양한 작가와 한 공간에서 작업을 선보일 수 있어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Q ‘반닫이’ 시리즈는 고가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입니다. 이 시리즈의 단초가 된 결정적 순간은 언제였나요?
A 10여 년 전, 영화 〈황진이〉의 미술감독을 맡았을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조선 시대를 고증하며 배경을 구상하던 중, 병풍 외에 공간을 채울 새로운 장식 요소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구한말 평양 기생이 반닫이를 여러 개 높이 쌓아두고 찍은 흑백사진을 보게 되었어요. 선물받은 물건들을 과시하듯 쌓아 올린 그 이미지가 무척 강렬했습니다. 이를 영화 세트에 적용하면서 ‘평양 반닫이’라는 오브제가 지닌 조형성에 깊이 매료되었죠.
흔히 한국의 미감을 이야기할 때 ‘미니멀리즘’을 떠올리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선의 장과 장롱에는 맥시멀하고 장식적인 요소가 공존합니다. 저는 그동안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한 이 화려하고 대담한 미감을 현대적 언어로 다시 풀어내고 싶었습니다.
Q 전통의 형상을 취하되 소재는 플라스틱을 선택했습니다. 극단적으로 다른 두 요소의 결합에는 어떤 의도가 담겨 있나요?
A 조사 과정에서 장 제작 장인들을 직접 만나뵈었고, 수요 감소로 인해 전통 기법의 맥이 끊길 위기에 놓여 있다는 현실을 알았습니다. 국가 인증을 받은 장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개장처럼 수요가 많은 작업에 비해 반닫이는 상대적으로 선택받지 못하고 있었죠. 작업의 완성도는 분명 뛰어났기에, 이 기술을 어떻게 하면 다시 활성화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가치 있는 ‘전통 기술’과 가장 쉽게 소비되고 버려지는 ‘플라스틱’이라는 재료를 결합해보자는 생각에 이르렀죠. 원래 나무로 제작되는 반닫이에 플라스틱을 적용해 가치 없이 소모되는 재질과 분명한 가치를 지녔지만 수입으로 이어지지 않는 장인의 기술을 엮고자 했습니다. 서로 상반된 가치를 의도적으로 충돌시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고, 플라스틱에는 또 다른 가치를, 장인의 작업에는 새로운 활용 가능성을 열고자 한 시도였습니다.
Q 구체적인 제작 공정이 궁금합니다.
A 먼저 평양 반닫이의 형태와 문양을 철저히 분석합니다. 그중 전통 문양을 선별해 재조합하고, 새로운 패턴을 디자인하죠. 이를 컴퓨터 일러스트로 1:1 사이즈로 출력해 장인에게 전달하면, 자개 작업을 하듯 문양을 판박이처럼 카빙carving 합니다. 즉, 전통 장을 만드는 구조적 기술은 그대로 따르되, 물성만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치환해 조각 형태로 완성하는 방식입니다.
Q 반닫이는 무언가를 담는 가구입니다. 투명한 소재를 사용함으로써 그 기능성이 전복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A 반닫이는 이름 그대로 ‘반만 열리는 장’으로, 본래 귀한 물건을 숨기기 위해 만든 가구입니다. 저는 이 ‘숨김’과 ‘투명성’ 사이의 긴장을 시각화하고 싶었습니다. 안이 훤히 보일 것 같지만, 실제로 무엇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 그 여백을 관객의 상상력에 맡기는 것이 이 작업의 핵심이죠. 이 반닫이가 생활용 수납장이 아니라, 하나의 조각 작품으로 인식되기를 바랍니다. 실용성을 덜어내고 그 자리에 개념과 조형미를 채워 넣은 오브제로 감상해 주셨으면 합니다. 자물쇠 열쇠를 안에 넣은 채 그대로 닫아버릴까 고민한 적도 있어요.(웃음) 열쇠는 분명히 보이지만, 누구도 열 수 없는 상태로 두고 싶다는 생각이었죠.
Q 런던 현지의 반응은 어땠나요?
A 이번에 전시한 두 점은 기존 대형 설치 작업을 축소한 미니어처 버전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선물처럼 건넬 수 있는 규모를 선택했죠. 오프닝 현장에서 관람객은 ‘평양 반닫이’라는 낯선 개념에 큰 호기심을 보였습니다.
슬래드모어 갤러리 역시 한국의 전통 오브제가 지닌 역사성이 현대미술의 어법으로 번역되는 지점에 주목하여, 2026년 가을을 목표로 개인전을 논의 중입니다.
Q 지난해 진행한 프로젝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작업을 꼽는다면요?
A 심청 이야기를 각색한 국립정동극장의 〈단심丹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개념적인 한국무용을 선호해 서사가 분명한 무용 작업은 잘 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제안을 받아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만 50회 공연을 진행했는데, 무용 공연으로는 드문 기록이었습니다. 이후 APEC 행사에서도 선보이게 되어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깊은 프로젝트로 남아 있습니다.
Q 요즘 최대 관심사와 앞으로의 계획은요?
A ‘반닫이’ 시리즈는 계속 이어갈 계획이지만, 이 작업에만 머무르기보다 그 안에 함께 다뤄야 할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치들을 발견해 공동 작업으로 확장하고 싶습니다. 공연과 전시 작업 역시 꾸준히 이어갈 예정이고, TV 드라마 제작과 영화 시나리오 작업도 진행할 계획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지금, 유행을 좇기보다 우리 고유의 미감과 전통의 가치를 깊이 있게 전달하는 데 집중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