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작당 하면 빼놓을 수 없는 <행복> 기획전. 여름을 맞아 부산을 찾은 행복작당은 에케 3층에 자리한 아파트먼트풀 스테이 31호에서 전시 <나의 수집 일지: 호호낙나好戶樂絡>으로 3일 동안 관람객을 맞이했다. 서울을 벗어나 진행한 첫 행사인 만큼 부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크리에이터 7인과 함께해 보다 뜻깊은 전시를 만들고자 했다. 저마다의 사연과 시간, 이야기가 담긴 수집품을 보기 위해 현장을 찾은 관람객들로 전시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각 인물의 개성만큼이나 관심사도, 수집품 종류도 각양각색. 어떤 이는 분리수거의 대상처럼 여겨지는 유리병을 수집하기도, 누군가는 1호 혹은 10호 사이즈의 작품만을 수집하기도 했다. 빈 상자를 모으는 사람도, 검은색 물건만을 집요하게 찾는 사람도 전시에 참여했다. 이렇듯 수집품 모양도, 수집가의 성향도 천차만별이지만 모든 물건 속 이야기는 하나의 문장으로 수렴했다. 그건 바로 수집이란 나 자신을 알아가는 하나의 과정임을, 수집품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수단임을, 이를 통해 우리는 한 사람의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신분석학자 살만 악타르는 <사물과 마음>에서 “여덟 개쯤 늘어놓은 라이터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기는 힘들어도 그 수가 80개나 8백 개라면 호기심이 동하고 8천 개에 이르면 눈이 휘둥그레진다”고 말했다. <행복> 기획전에는 그 정도로 많은 수집품이 진열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물건 하나하나를 들여다보고 그 속에 깃든 일화를 듣다 보면 숫자로 가늠할 수 없는, 눈이 휘둥그레지는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수집은 한 사람의 시간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기획전은 막을 내렸지만 크리에이터 일곱 명의 수집품으로 수놓은 전시 현장을 지면에 담았다.
크기와 감동이 반비례하는 작품
작품 속에도 표정과 시선이 존재한다. 하나하나 세심히 바라보면 그 속에서 어딘지 모르게 일상적인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미들맨갤러리 정순목 대표는 20대 후반부터 다양한 작품을 수집했다. 특이한 점이라면 1호 크기 혹은 10호 크기의 작품만을 모은다는 것. 전시를 위해 그가 진열한 수집품은 비록 사이즈는 크지 않지만 작품이 주는 감동의 규모는 결코 작지 않았다.
하얀 조명은 김상인 작가의 ‘카우보이Cowboy’, 중절모를 쓴 조각은 문형태 작가의 ‘포트레이트Portrait’, 듀오 작가 마이테 이 마누엘Maite y Manuel의 ‘무제’, 블루 톤으로 조화롭게 배치한 베이스먼트의 ‘나싱NOTHING’과 모구 다카하시의 ‘아이스 독ICE DOG’, 제각각의 천 인형이 나란히 들어선 노석미 작가의 ‘스몰 피플Small People’, 동물 모양의 세라믹 뒤 강준석 작가의 ‘무제’. 가죽 셰이커 박스는 린보Linbo 제품. 그 외 회화는 모두 문형태 작가 작품.
무채색도 색이다
색에 대한 집착이 하나의 색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수집가 권민지는 언젠가 우연히 검은 드레스와 인연을 맺은 후부터 검은색 물건을 모아왔다. 색은 같지만 형태가 다른 수집품이 하나둘 모이자 한 인물의 색이 또렷해졌다.
로젠탈 컴퍼니 테이블 위 미키 모양 조각은 파비앵 베르스하레Fabien Verschaere 작품. 은빛 마트료시카는 메종 마르지엘라 제품. 검은색 플라워 쿠션은 무라카미 다카시 작품. 토르 컨테이너는 헬리녹스 콜라보 제품. 키드로봇의 토끼 피겨 아래 있는 스툴은 판지 스튜디오 제품. 털수염풀, 추파추와 이끼 등 그라스를 언덕처럼 겹겹이 쌓아 숲의 모습을 표현한 플라워 어레인지는 블루가든 아카이브 연출.
수단이자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도구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도구를 쓴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도구를 모으기도 한다. 스튜디오 티트 강미나 대표는 목적과 쓰임에 관계없이 도구의 형태 자체에 주목한다.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그의 수집품을 보고 있자면, 도구는 어느새 감상의 대상으로 변모한다.
파리 방브 벼룩시장에서 구매한 빈티지 뜨개용 도구, 도쿄 여행 중 구입한 접이식 자, 할머니가 물려준 재단 가위와 유물 복원가 남동생이 직접 만든 대형 컴퍼스 등 강미나 대표의 수집품에는 저마다의 추억이 깃들어 있다.
빈 병 속에 담긴 무한한 가능성
여백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아무것도 없기에 무엇을 그려갈지 자유분방하게 움직일 수 있다. 복합 문화 공간 레레플레이의 윤이서 대표는 종이가 아닌 빈 병을 보면 마음이 간지러웠다. ‘이 병에는 꽃을 꽂으면 좋겠다’ ‘저 병은 두 개를 잘라서 붙여보면 좋겠다’ 같은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 문장이 모여 창작이 됐다. 남들은 종이를 자르고 붙이지만, 그는 병을 자르고 이어 붙이며 자신만의 오브제를 완성했다.
레몬주스병의 윗부분, 중국에서 가져온 맥주병, 미에로화이바병과 일본에서 산 술병을 이어 붙인 유리병, 각기 다른 병의 윗부분만을 접합해 완성한 유리병은 모두 윤이서 대표의 작품. 유리병에 꽂은 들풀은 블루가든 아카이브 연출.
여행지에서 만난 종이
한 아이가 있었다. 어릴 적부터 종이를 좋아했다. 보이는 족족 이것저것 끄적였다. 종이를 좋아하니 종이와 친한 연필, 수첩, 지우개와도 돈독한 사이가 됐다. 누군가는 애물단지라고 여기는 전시 브로슈어도 그의 눈에는 한없이 아름답게만 보였다. 미술 공간 아트펑키 운영자 장유진은 지류와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모았다. 쌓인 종이 수집품만큼 그만의 인생 페이지가 만들어졌다.
도쿄의 위트레흐트 독립 서점과 츠타야에서 구입한 필리프 와이즈베커의 책. 브루노 무나리의 도서는 오모테산도 츠타야에서 구매한 것. MeMo 도서는 파리의 어린이 서점이자 워크숍 공간 뮤제 드 포슈Msée de Poche에서 구입했다. 종이로 만든 인형은 모두 아트펑키의 펑키 제이funky j 작품, 뜨개 작품은 스튜디오 티트 제품.
물건이 아닌 마음을 담는 상자
또 다른 아이가 있었다. 달콤한 사탕이 아니라 그걸 담은 틴 케이스가 갖고 싶어 사탕을 샀다. 훗날 아이는 어른이 되어 소중한 이에게 마음을 전할 선물을 아름다운 상자에 담아 건넸다. 비어 있지만 비어 있지 않은 공간, 가벼워 보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마음이 담긴 상자. 에크루 이효진 대표에게 상자란 여백이자 가능성, 성의를 담는 그릇이다.
뵈르게 모겐센의 라운지체어 2256 위 인형은 미나 페르호넨 제품. 비코 마지스트레티의 스노우 플로어 램프 앞 흰색과 짙은 밤색 셰이커 박스는 키미누 작가, 얇은 검은색 박스와 그 아래 원통형 셰이커 박스는 이후지 작가, 대형 셰이커 박스 위 미니 자작나무 바구니는 오디너리 작업실 작품. 긴 대나무 바구니는 디앤디파트먼트 판매. 2단 대나무 바구니는 후쿠다 마리코 작품.
무엇을 올릴지에 따라 달라지는 그릇
소반은 말 그대로 작은 상이다. 식기를 받쳐 나르기도, 음식을 차려 먹을 때 쓰곤 했다. 1인 1상을 기본으로 하던 예전에는 다양한 크기의 소반이 존재했다. 그소반 위에 음식이 아닌 다른 걸 쌓으면 어떨까? 인테리어 디자이너 전아란은 그 위에 달항아리도 올려보고, 조각품도 올려보곤 한다. 작은 상 위에 상像을 덧대어보기도 하고, 작은 상보다 더 작은 상을 찾아보기도 한다.
문형태 작가의 유화와 키치한 오브제를 올린 장방형 옻칠 나주 소반은 모두 이상형 작가, 다각형 나주 소반은 무형문화재 김춘식 장인, 아담한 은칠 달항아리는 여운경 작가 작품. 소반 사이 철원 꽃창포 분재와 청송 백자 옆 그라스는 블루가든 아카이브 연출. 에리크 예르겐센의 EJ315 소파 위에 프랑스 작가의 먼지 인형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