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마셨기 때문에 읽을 수 있었다. 대량 인쇄를 가능하게 했던 금속활자 기술이 바로 포도를 압착(press)해 와인으로 만드는 기술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구텐베르크가 와인을 만드는 방식으로 인쇄물을 만들게 된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다. 구텐베르크는 와인 생산으로 유명한 도시 마인츠에서 나고 자랐고, 그의 아버지는 조폐국에서 일하던 금속 세공 기술자였다. 와인 주조 기술과 금속 세공 기술을 눈여겨본 구텐베르크는 익히 알려진 사실대로 유성 잉크를 위에서 아래로 압착해 빠른 인쇄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서양인을 정보의 암흑 시대에서 해방시켰다. 그러니까 아스파탐을 좀 보태서 말하자면, 취하고자 하는 의지가 타이포그래피의 역사를 만든 것이다. 그럼 지금, ‘프레스’되어 나오는 술병 위에 쓰인 활자는 어떻게 보면 좋을까?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조차 맛보고 싶게 만드는 압축된 글자가 쓰여 있나? 서체 디자인 스튜디오 양장점에 물어봤다.
장수영
양장점의 한글 서체 디자이너. 격동고딕과 격동굴림 서체를 제작했고 본고딕의 서체 디렉터로 참여하기도 했다. 격월간지 〈미스테리아〉의 제호 디자인과 요기요, 광화문 국제단편영화제 등에서 레터링 작업을 선보였다. 소주를 잘 마실 것 같다는 오해를 종종 사는데 아니다. 술맛보다 향을 즐기지만 코가 건강하지 못한 편이다.
버드나무브루어리 강릉 맥주
강릉의 오랜 역사를 간직한 막걸리 양조장을 이어받아 맥주 양조장으로 운영 중인 버드나무 브루어리. 이 브랜딩에서 보이는 일러스트와 레터링의 긴밀하고 유기적인 관계는 강릉의 자연과 풍경을 쌀, 국화, 솔잎, 오죽 등의 재료로 담은 그들만의 개성을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양조장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는 듯한 라벨에 순명조가 자연스럽게 앉아 있다. 수많은 요소가 빠짐없이 들어갔음에도 전혀 요란해 보이지 않는 저 작은 강릉의 풍경이 마치 데이터 손실 없이 적은 용량을 유지하는 RAW 파일 이미지를 건네받은 느낌이다. 이 보틀 라벨의 실물을 ‘영접’하기 위해 이번 휴가는 강릉으로 결정했다.
그랑꼬또 청수
‘김씨네 체육관’, ‘Kim’s Gym’. 두 가지로 프린트된 티셔츠가 있다면 당신은 어떤 티셔츠를 입고 밖을 다니겠는가? 한글은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조합의 원리와는 다르게 시각적인 구조가 다소 복잡하며 우리말의 어감까지 더해져 라틴 알파벳에 비해 세련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그랑꼬또 와이너리는 라벨에 과감히 한글을 사용함으로써 국내 생산 브랜드임을 전면에 드러냈다. 가운데 무게중심을 두고 오르내리는 글줄의 리듬감과 기하학적 특징이 강한 산돌 서울체의 조형이 라틴 알파벳의 조형과 닮아서일까? 진부하다는 오해를 자주 사는 한국 술의 느낌은 완벽히 피한 것 같다.
백세주
한때 많은 사람들이 디돈Didone 계열의 라틴 알파벳 디자인과 어울리는 한글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양한 한글 조형을 실험했던 시기가 있었다. 2013년 출시한 안삼열체는 앞서 이 모든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한다는 느낌이 들 만큼 조형이 참신했고, 현재까지도 많은 디자이너들이 손에 꼽는 글자체이다. 백세주의 레터링은 이러한 안삼열체에 정제된 흘림의 표현을 가미한 현대적인 콘셉트로, 안삼열 디자이너 본인의 작업이다. 원작자가 자신의 글자를 또 한 번 다듬었으니 완성도는 두말할 나위 없다. 과거에 한자를 사용해 전통적인 인상을 풍겼던 백세주의 이미지를 스스로 깬 국순당의 결정에도 박수를 보낸다.
여유
자소와 자소, 획과 획 간의 거리감, 점에 가까운 이응 표현, 여백이 돋보이는 흰 바탕에 먹으로 쓴 붓글씨…. 이 라벨에 사용한 ‘여유’라는 두 글자를 타이포그래피 관점에서 분석하라고 하면 이러한 말을 늘어놓을 수는 있겠다. 그렇지만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눈에 닿는 순간 이미 여유가 느껴진다면 그게 정말 멋진 타이포그래피가 아닐까. 이런 캘리그래피 작업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매력을 드러냈다. 제도화된 글자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캘리그래피 작업물을 기피해왔는데 반성의 시간을 선사한 고마운 라벨 디자인이다.
양희재
양장점의 로만 타입 디자이너. 피프티체(Fifty Font), 궁전체(Palais Font) 등으로 로마 알파벳을 사용하는 나라의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세븐틴의 4집 앨범 타이틀곡 ‘HOT’의 레터링, 네이버 신사옥에 사용한 서체 ‘네이버 1784’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술은 여자 친구가 마실 때 옆에서 잘 지켜보는 편이고, 직접 운전해서 집에 온다.
뤼들라스와프 Rue de la Soif
오늘날 서체 디자이너의 목표는 현대적 글자를 만드는 것이다. 개인적인 기준으로 현대적 글자란 명확하게 기능하는 것, 정확하게 계획된 형태를 갖는 것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글자를 보면 흔들린다. 유럽의 옛 거리 사인에 쓰인 글자는 다소 조악할지라도 충분히 제 기능을 하며 또 직관적으로 좋은 디자인으로 느껴진다. 만약 내가 이 라벨에 쓰인 글자를 현대적으로 바꾼다면 잃는 것이 훨씬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의도적으로 조악하게 해야 하는 걸까? 답은 아직 모르겠다. 다만 글자 문화의 길고 방대한 역사가 형태의 완성도보다 중요할 때도 있다.
가메 드 보뇌르Gamay de Bonheur & 문워크Moonwalk
ATF(American Type Founders)의 디자이너 모리스 풀러 벤튼Morris Fuller Benton이 디자인한 활자체 ‘브로드웨이Brodway’는 미국 아르데코 스타일의 서체 중 가장 잘 알려졌다. 두 와인의 라벨에 적용한 이 서체는 이름처럼 화려함, 재즈를 연상시키는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19세기의 팻 페이스(Fat Face) 스타일과 연관성이 있는 거대한 부피와 강한 획 대비를 보여주지만 장식적인 요소는 제외해 정확한 기하학적 형태를 보인다. 비슷한 서체로는 ‘갈리아Gallia’, ‘볼 미치Boul Mich’, ‘파리지안Parisian’ 등이 있다.
보졸레 블랑 Beaujolais Blanc
이 라벨에 사용한 글자 디자인은 셀틱Celtic, 포럼 플레어Forum Flair와 유니버시티 로만University Roman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1930년대 후반 스피드볼 레터링 카탈로그에 등장한 로스 F. 조지Ross F. George가 디자인한 서체 스턴트 로만Stunt Roman을 기반으로 한다. 로스 F. 조지의 멘토였던 윌리엄 휴 고든William Hugh Gordon과 함께 스피드볼 펜을 발명하고 이를 홍보하기 위해 펜 사용 지침서를 만든 것이 바로 그 카탈로그다. 완전한 원형과 타원형, 수직적이고 좁다란 비율, 약간 어긋난 정렬이 독특한 인상을 준다.
라 랑테른 루주 La Lanterne Rouge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글자 디자인 취향으로 와인을 고르자면 바로 이 와인이다. 라벨 디자인에서 글자는 일러스트레이션이나 사진처럼 다른 요소들과 함께 사용된다. 이때 다른 그래픽 요소들과 글자의 조화를 고려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일러스트레이션이 이미 와인을 충분히 표현한다면 글자는 중립적인 것을 선택할 것. 글자의 모양이나 묘사가 아니더라도 내용으로 이미 의미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표현으로 가득 찬 와인 라벨 중 이러한 형태의 글자가 가장 내 눈을 사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