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주인공 혜원은 왜 다시 고향에 돌아왔느냐는 친구의 물음에 “배고파서”라고 답한다. 외로운 도시 생활에 지친 혜원의 허기를 채워준 것은 직접 키운 농작물로 만든 든든한 밥상. 비록 그처럼 마음이 헛헛할 때마다 신선한 식재료를 찾아 자연으로 떠날 수는 없지만, 클릭 몇 번으로 산지 직송 신선 식품을 식탁 위에 올리는 것이 어렵지 않은 시대다. 자연이 키운 농작물의 아름다움과 농부의 마음, 원산지의 분위기까지 충만하게 전달하는 브랜드와 패키지를 모았다. 젊은 농부들은 향토적 색채만 강조했던 기존 농산물 브랜드 생태계를 교란하는 중심에 있다. 여기에 지역 활성화와 농부의 정성에 공감한 디자이너들이 가세했다. 농촌의 먹거리를 활용해 브랜드 철학과 감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기업 활동도 눈에 띈다. 먹기 이전에, 보고 느끼고 즐기고 나누는 농업 브랜드는 이렇게 탄생한다.
1 곡물집
곡물집은 기업에서 브랜드 제품 기획자로 일하던 김현정, 문화·예술과 농업을 연결하는 프로젝트를 이어가던 천재박 두 대표가 설립한 곡물 경험 브랜드다. 이들은 충청남도 공주시에 공간을 운영하면서 토종 곡물을 경험하는 여러 가지 방식을 제안하고 있다. 토종 곡물이란 특정 지역의 기후와 토양에 적응해 오랫동안 살아남은 곡물을 말한다. 이들이 토종 곡물에서 주목하는 것은 ‘생물 다양성(biodiversity)’. 정형화, 규격화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외면받아온 토종 작물에서 오히려 다양성 보존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한 것이다. 개인의 취향과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오늘날의 소비자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제시한다는 점은 곡물집의 매력이다. 이를 위해 ‘전국씨앗도서관사회적협동조합’과 협력해 토종 씨앗을 보존하고 보급하는 농부와 단체로부터 곡물을 공급받는다. 200g으로 소포장한 곡물 패키지와 쇼룸 디스플레이는 각 곡물의 개성과 다양한 선택지를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고급 스페셜티 원두 포장을 연상시키는 패키지는 곡물집의 장인선 그래픽 디자이너가 곡물마다 특징을 재해석한 것이다. 스몰바치스튜디오의 강은경 디자이너와 협업한 곡물 경험 워크숍, 김연수나태주천운영 작가와 진행한 푸드 커뮤니케이션 프로그램 등 곡물집은 다양한 시도를 모색하며 토종 곡물의 가치를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a-collective-grain.kr
기획·운영 어콜렉티브그레인(ACG), (대표 김현정)
브랜드 디렉팅 천재박(ACG)
그래픽 디자인 장인선(ACG)
공간 디자인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 중간공간연구소(김건태, 김보람)
2 선암파머스
선암파머스는 경상북도 문경시 선암리에서 과일과 채소, 그리고 이를 이용한 가공식품을 선보이는 브랜드다. 40년 넘게 사과 농사를 일궈온 부모님의 사과 농장을 아들 권도형 대표가 이어받았다. 농촌과 도시의 삶을 모두 경험한 그는 사과 농장의 리브랜딩을 통해 도시에도 산 좋고 물 좋은 선암리의 건강한 매력을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네이밍부터 패키지 디자인까지 브랜딩 프로젝트는 디자인 스튜디오 mtl이 맡았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외국 농장과 와이너리의 브랜딩 사례를 참고해 선암리라는 지명, 농장과 농부의 정체성을 전면에 드러낸 것이 핵심이다. 이를 바탕으로 사과 심벌과 워드마크로 이루어진 조합형 로고를 완성했다. 황색 종이 박스 패키지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절제된 디자인이 돋보인다. 한 면에 들어가는 그래픽 요소와 정보를 제한해 다양한 각도에서 패키지를 바라보는 재미와 함께, 박스가 층층이 쌓여 있을 때 덩어리를 이루는 그림과 문자 사이의 시각적 균형도 놓치지 않았다. 선암파머스는 앞으로 주변 농가와 협업해 새 상품 개발과 브랜드 인지도 향상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sunamfarmers.com
기획·운영 선암파머스(대표 권도형)
브랜딩·디자인 mtl(대표 김효빈), studiomtl.kr
3 너에게귤
제주도 서귀포에 위치한 너에게귤은 타이벡 농법을 이용해 귤의 품질을 꼼꼼하게 살피는 농장이다. 제주도의 햇살과 바람, 따뜻한 마음과 정성을 담아 ‘너에게’ 보낸다는 이름에 걸맞게 브랜드 아이덴티티는 포근하고 산뜻하다. 삐뚤빼뚤한 귤 모양 심벌과 꾹꾹 눌러쓴 손글씨 같은 서체가 마치 엽서에 붙인 우표와 스탬프 같다. 노란색 비정형 원으로 표현한 귤은 사실적 표현을 원하는 클라이언트와 추상적 표현을 원하는 디자이너가 수많은 드로잉을 시도한 끝에 합의에 이른 결과물이라고. 하우스 귤처럼 매끈하고 예쁘진 않지만 아기자기하고 정감 있는 노지 귤을 형상화한 도형은 바스켓에 가득 담긴 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반복 패턴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농장에서 수확한 귤로 만든 귤잼, 감귤꽃꿀, 귤 주전부리 등의 상품 포장에 적용한 패턴 덕분에 선물용으로도 반응이 좋다. 쏟아지는 햇살, 기분 좋은 바람, 귤밭을 둘러싼 돌담, 귤꽃 향 등을 표현한 싱그러운 일러스트레이션이 패키지와 홍보 그래픽 곳곳에서 수공예적 인상과 친근함을 더한다. @barameebunda
기획·운영 너에게귤(대표 이상은)
브랜딩·디자인 AURG(대표 백송이·박진택), aurg.kr
4 부지런한농부
부지런한농부는 전라남도 고흥 해창만 간척지에서 직접 기르고 수확해 햇볕에 건조한 햅쌀과 잡곡 브랜드다. 햇살이 풍부한 해창만 간척지는 한 해 평균 1만 2000여 톤의 수확량을 자랑하는 대표적인 곡물 산지로 유명하다. 건강한 방식으로 재배하고 정성껏 기른 상품을 공급하는 브랜드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 YNL 디자인은 ‘고흥’이라는 지역성에 집중했다. 다양한 품종의 농작물을 생산하는 경작지를 직접 답사하고 이를 현대적인 일러스트레이션으로 풀어낸 것이다. ‘부지런한 농부의 사계절과 시간’을 콘셉트로 한 열두 가지 그림에는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아름다운 고흥의 풍광을 배경으로 땀 흘려 일하는 농부의 모습을 직관적이면서도 세세하게 담았다. 다채로운 색깔의 일러스트레이션은 부지런한농부의 핵심 상품인 원통형 소량 곡물 패키지에 제격이다. 다양한 제품의 맛을 표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기호 식품처럼 소비하는 특별한 곡물 경험을 강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핸드 드로잉 스타일의 로고는 전통적으로 곡식에서 티끌을 골라내는 데 사용했던 키를 기본 형태로 해 잘 여문 햅쌀의 형상을 장식적 요소로 활용했다. @nongbustore
기획·운영 부지런한농부(대표 정민준)
브랜딩·디자인 YNL 디자인(대표 이유나), ynldesign.com
사진 YNL Design
5 허니그린의 자연이 만든 혁신 프로젝트
농산물은 종종 그 자체로 훌륭한 디자인이다. 태양, 바람, 물과 흙, 그리고 동식물이 만든 색과 형태가 사람이 만든 그 어떤 것보다 경이로울 때가 있다는 말이다. 스페인의 벌꿀 기업 허니그린HoneyGreen+와 디자인 스튜디오 컬드색 커스텀CuldeSac Custom이 진행한 브랜드 경험 디자인 프로젝트 ‘자연이 만든 혁신(Innovation by Nature)’은 꿀의 물성을 디자인 요소로 십분 활용했다. 투명한 아크릴 블록에 90% 용량으로(공기 방울을 만들기 위해서) 꿀을 채워 넣어 종류에 따라 오묘하게 다른 빛깔, 투명도, 질감, 농도를 감각적으로 느끼고 비교할 수 있게 했다. 웰니스의 변화를 앞장서 고민하는 기업 철학을 드러내기 위해 미래적인 콘셉트를 취했는데, 구체적으로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꿀 캡슐을 우주로 보낸다면 어떤 케이스에 담을지를 상상하며 만든 2m 높이의 모듈러 가구는 이동이 용이해 다양한 행사에서 활용할 수 있다. 조명 패널에 꿀 캡슐을 탈착할 수 있어 여러 가지 디스플레이가 가능하다. honeygreen.com
기획·운영 허니그린(대표 하이메 페란도Jaime Ferrando)
디자인 컬드색 커스텀, culdesac.es
사진 Hello Bien Studio
6 알리바바의 ‘먼 곳의 아름다움 찾기’ 프로젝트
중국 알리바바 그룹은 사회 공헌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농촌 발전과 디지털 농업 기술에 장기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디자이너 또한 농촌 진흥에 기여하고 있는데, ‘먼 곳의 아름다움 찾기’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중국 서북부 지역의 산시성 퉁촨시 이쥔현은 천혜의 자연 조건으로 우수한 농산물을 생산하지만 품질에 걸맞은 패키지가 없거나, 가격 부담으로 주변 농가의 패키지를 이용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알리바바의 디자이너들은 현지의 문화적 특색이 담긴 농민화를 모티프로 사과 패키지를 새롭게 디자인했다. 지역 농민화 ‘사과 따기’에서 차용한 사과를 줍는 농촌 여인의 모습, 현지 비석에 새겨진 석각 글자체를 참고해 만든 레터링이 특징이다. 소외된 농촌으로 직접 찾아간 알리바바 디자이너들의 활동을 그저 농산물의 포장을 바꿔줬을 뿐이라고 치부하기엔 경제적 파급력이 상당했다. 알리바바의 온라인 쇼핑몰 타오바오에서 3시간 동안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특별 판매한 지역 농부들의 상품이 무려 6만kg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쥔현 외 3개 현에서 추진한 ‘먼 곳의 아름다움 찾기’ 프로젝트는 2021년 알리바바 직원 공익 사업 부문 최고상을 수상했다. alibabagroup.com
기획·디자인 알리바바 ‘먼 곳의 아름다움 찾기’팀
7 에피그램 로컬 프로젝트, 강진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에피그램은 2017년부터 매년 아름다운 국내 소도시를 찾아 현지 특산품과 먹거리를 알리는 ‘로컬 프로젝트’를 이어오고 있다. 경주, 광주, 하동, 옥천에 이어 올봄 에피그램이 찾은 곳은 전라남도 강진. 월출산과 강진만의 청정 갯벌이 선사하는 풍요로움으로 가득한 남쪽 끝 바닷가 마을이다. 로컬 프로젝트는 지역을 대표하는 컬러를 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번에는 강진을 대표하는 고려청자에서 따온 ‘강진청자비색’을 시즌 컬러로 정했다. 에피그램은 강진청자비색을 직영 카페 올모스트홈의 드립백 패키지와 로컬 푸드 리패키지에 반영했다. 겨울이 온화하고 바다를 끼고 있어 식자재가 풍부한 지역의 장점을 고려해 유구한 전통의 다산 명차, 매생이 떡국 등 우수 먹거리를 강진 청자의 푸른빛을 입힌 패키지에 담아 출시한 것이다. 신유림 작가는 월출산과 강진 다원, 가우도와 매생이 양식장 등 지역 풍경을 그려 넣어 강진의 숨은 아름다움을 그만의 시선으로 풀어냈다. @epigram_official
기획·디자인 코오롱인더스트리FnC, kolonfnc.com
일러스트레이션 신유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