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2020년, 전례 없는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덮쳤다. 이 바이러스는 강력한 전염성으로 지구를 팬데믹에 빠트렸으며 지구인의 삶에 변곡점을 일으킨 사건으로 기록됐다. 도시마다 사회적 거리 두기 지침이 내려지면서 공원은 텅 비었고, 개학은 하염없이 연기되었으며, 재택근무의 일상화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발열과 호흡기 질환을 대비해 달고나 커피를 마시는 한국인들의 민간요법은 밖에 나갈 수 없어 고독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집에서 하기 시작한 노동 집약적 놀이에서 비롯한 것이다(설탕을 400번 저으면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어느 사이비 종교의 기도법이라는 항설도 있지만 그건 사실 무근이다). 또한 ‘동물의 숲’이라는 가상 공간에 모여 서로 정신 건강을 보살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이러스 감염을 무릅쓰고 상점 앞에 줄을 서서 이 세계에 접속하기 위한 게임기를 구매했다는 이야기도 무용담처럼 전해 내려온다. ‘거리는 멀어져도 마음은 가까이’라는 지구의 슬로건이 만들어진 것도 이때다. 사람들은 이전부터 온라인 네트워크로 느슨한 연대를 이뤄왔지만 이를 기점으로 각국의 창작자들이 다양한 온라인 이벤트를 열며 국경과 시차를 넘은 연대가 강화되었다. 현재의 일상이 시작된 2020년의 비일상은 이렇게 시작됐다.
온라인에서 벌어진 느슨한 연대
2020년에는 규모를 막론하고 전시와 행사가 줄줄이 취소됐다. 밀라노 국제가구박람회를 비롯해 아트 바젤, 심지어 올림픽까지. 당시 사람들은 요즘과 달리 온라인 공간이 오프라인의 대안이자 도피처였기에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각종 이벤트를 열었다.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세 개의 온라인 전시는 코로나19 이후 ‘글로벌 디자이너’라는 말이 구태의연한 수식어가 됐음을 보여준다.
〈네오-트라이브2020: 사회가 잠시 멀어졌을 때〉
neotribe2020.xyz
17명의 국내 그래픽 디자이너가 독립 폰트로 시대를 반영한 목소리를 냈다. 각각의 메시지는 코로나 바이러스로부터 빼앗긴 일상 속에서 안부와 위로를 전한 것. 긍정적인 희망과 유대감이 담긴 문장들이다.
기획 이도타입
참여 작가 고경아, 김동관(한글씨), 김리원, 김양진, 김태룡, 노은유, 박한솔, 신건모, 오래오스튜디오, 유형진, 이노을×로리스 올리비에, 이주현, 정지혜, 진유성, 채희준, 하형원, 함민주
〈Imagine, Uncertain time〉
imaginedforuncertaintimes.com
물리적으로는 하염없이 먼 도시의 디자이너 10명(팀)이 한 곳에 모였다. 스팟 스튜디오의 니콜라 카넬라스Nicholas Cañellas 가 평소 온라인상으로 주시하던 7개 도시의 제품 및 가구 디자이너를 결속시킨 것. 약간 기이한 공간과 조형적인 가구들이 오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기획 스팟SPOT 스튜디오 Nicholas Cañellas
참여 작가 Eimear Ryan, Argot Studio, Laurids Gallee, Lea Mestres, Benjamin Gillespie, Ovuud, Serban Ionescu, Utharaa Zacharias&Palaash Chaudhary, soft-geometry, Merle Flügge & Job Mouwen, Supertoys Supertoys, Adam&Mark, VIDIVIXI, Andreas&Steve, Voukenas Petrides,Yeon JinYoung, Nicolás Cañellas, SPOT Studio
〈rgrt〉
0000-dddd.com
일종의 산 자와 죽은 자의 불가능한 거리를 연결하는 시도다. 알고리즘을 통해 만들어진 소리의 세계. 한국의 자살률에 관한 수치를 알고리즘에 적용했다. 죽음에 대한 숫자가 소리로 변할 때, 공간은 마치 무중력처럼 가벼워진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기획 DDDD
참여작가 mnm×bho.la
팬데믹에 대처하는 디자이너의 크리에이티비티
SNS는 코로나19 상황의 생활 문화사를 연구할 수 있는 거대한 디지털 유적지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 도래한 일상을 기록했고 크리에이터들은 서로를 응원하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호쾌한 메시지를 업로드했다. 코로나19의 태풍 속에서 탄생한 이 이미지에서는 팬데믹 상황에서도 유머와 재치를 잃지 않은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인스타그램 the_last_dodo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그래픽 디자이너 사비에르 세거스Xavier Segers.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가상 스토리와 함께 만든 타이포그래피다. 내용은 이렇다. 어느날 벨기에와 한국 과학자들이(사비에르 세거스는 벨기에-한국 혼혈이다) 어느 박테리아에 코로나 바이러스를 주입하는 실험을 벌였는데 그 결과로 이러한 이미지가 형성되었다는 내용. 아름다우면서 섬뜩하다.
인스타그램 dudewithsign 뉴욕 맨하탄의 사이다 세스Seth. 짧고 간결한 메시지를 적어보이는 퍼포먼스로 유명했다. 그는 코로나19 사태가 심각해지자 거리에 나오는 대신 창 밖으로 피켓을 내보이는 식으로 대체했다. 물론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라는 악플도 늘 즐비했다.
인스타그램 jaimehayon 스페인 출신 디자이너 하이메 아욘Jaime Hayon. 코로나19로 침체에 빠졌던 한국, 이탈리아, 스페인을 위해 응원의 마음을 듬뿍 담은 메시지를 선보였다. 하트를 마구 마구 그려 넣은 드로잉에서 그의 긍정적인 기운이 물씬 풍긴다.
페이스북 jay.lee.94801 키커랜드 디자이너 이재유Jay Lee. 코로나19로 칩거하던 시기에 만든 오브제다. 찌그러진 맥주캔으로 만든 오브제 ‘킹 코로나’는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무자비한 코로나 바이러스를 왕으로 묘사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을 모두 읽어보는 것이 좋으니 페이스북 계정에 방문하기를 적극 추천한다.
인스타그램 roa_color 네덜란드 그래픽 디자이너 크리스토프 브래치Christop Brach와 다니에라 테 하허Daniera ter Hahar 의 합작이다. 재채기 한번에 침방울이 10만개가 퍼져나온다는 사실을 아는가? 옷소매로 입과 코를 가리는 방법이 적극적으로 권고되는 이유다. 이들의 제시한 솔루션은 양말의 발가락 부분을 자르고 발꿈치 부분을 팔꿈치에 맞춰 끼는 팔꿈치 양말이다.
인스타그램 pablo.rochat 각종 이모티콘과 디지털 디바이스를 이용해 유쾌한 비주얼을 선보이는 파블로 로챗 스튜디오Pablo Rochat Studio의 아트 디렉터. 모니터 속 이미지를 현실로 가장해 스테이 앳 홈Stay at home을 실천한 각종 방법(이라고 쓰고 몸부림이라고 읽는다)을 업로드했다.
2020년의 휴먼 스케일
코로나19 사태 이후 ‘거리’와 ‘간격’에 대한 개념이 재정립됐다. 예컨대 악수나 포옹이 연인이나 아주 친한 사이에서만 허용된 것도 이때부터다. 공공장소의 1인 2석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건축 지표인 휴먼 스케일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성큼 벌어졌다.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이 2020년 이전에는 무심코 내뱉는 인사말이었다는데. 2020년 이전은 상상할 수 없이 정감이 넘치는 사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산도시공사 직원 공개채용 필기시험 모습. 감염 차단을 위해 안산시에 위치한 와스타디움 축구장에서 열렸다. 한가운데 5m간격으로 140여개의 책상과 의자를 놓고 진행됐다.
이탈리아 피렌체 근처 마을인 비치오Vicchio의 지오토 광장Piazza Giotto. 코로나바이러스 감염 예방을 위해 권고되는 거리인 1.8m를 기준으로 광장 바닥을 표시했다. 캐럿 스튜디오 caretstudio.eu 사진 Francesco Noferini ©Caret studio
감염 예방을 위해 거리두기 실천을 보여주는 도시의 테이핑. tape_measur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