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일할 공간을 두고 그 안에서 자기 발전을 이루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 생겼다. ‘긱 워커’ 또는 ‘업글인간’. 문자와 언어, 텍스트를 시각적으로 그려내는 아티스트 켈리 박도 일과 삶을 한데 꾸려나가는 공간에서 작업의 깊이를 더해가는 중인 긱 워커다. 취향으로 채운 공간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고, 나와 내 커리어를 모두 성장케 하는 일. 그는 이런 삶이 정말 실현 가능하다고 말한다.
물감이 묻은 붓, 팝 아티스트 카우스의 피겨가 작업 중인 작품과 어우러져 있다. 식물 큐레이션은 모두 ‘심다Simda’의 작업.
오래전 그가 살던 작은 오피스텔에서 아티스트 켈리 박을 만난 적이 있다. 벽걸이형 CD플레이어가 있었고, 거기에서 쳇 베이커의 ‘Time after time’이 흘러나왔다. “난 내가 아는 것만 알 뿐이죠/ 흘러가는 시간이 내게 보여줄 거예요/ 당신은 나의 마음을 아주 젊고 새롭게 하죠.” 흐르는 가사처럼 방에 놓인 작품은 젊고 새로웠다. 분홍, 검정, 노랑, 초록… 밝은 색조를 사용해 펜과 마커 펜, 물감으로 쓴 글과 그림에서 긍정의 기운을 느꼈다. 가장 많이 쓴 문장이 무엇이냐 묻자 “Make your dreams happen”이라고 답했다. 예술고등학교를 나와 대학에선 도예를 전공하며 도자기와 섬유를 배웠고, 졸업 후엔 아트 컨설팅 회사에서 인턴 생활을 한 작가. 그때 양주혜 작가의 공공 예술 프로젝트인 ‘옥수동 프로젝트’를 가까이서 보고, 이강소 작가의 작업 아카이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길을 생각했다. 한동안 작가 지망생으로서 취향과 작업을 틈틈이 쌓아나갔고, 마침내 30대에 작가의 삶을 시작했으니 ‘꿈’은 그에게 어울리는 단어다.
거실과 마주 보는 작업실. 아침 햇빛이 잘 드는 동향집이라 ‘올빼미형’ 작업자이던 켈리 박은 요즘 ‘아침형’ 작업자가 됐다.
켈리 박의 ‘Cheeeze’ 연작.
아티스트 켈리 박은 ‘The Bag Project’로 유명하다. 작가가 컬렉터의 경험과 추억을 가방에 그려내는 프로젝트로, 작업 방식이 독특하다. 첫째, 작가가 SNS를 통해 작업의 시작을 알리고 참여자(컬렉터)를 모은다. 둘째, 참여자가 작가에게 사연을 보낸다(양식은 자유롭다. 어떤 이는 일기장을, 어떤 이는 좋아하는 단어를 적어 보내기도 한다). 셋째, 작가가 사연을 읽고 흰 가죽 가방 위에 자신이 느낀 감정을 그린다. 마지막으로 몇 달 뒤 사연을 보낸 컬렉터가 가방을 받는다. 사연을 생생하게 읽어주는 라디오 DJ처럼 켈리 박은 어떤 이의 기억을 재료 삼아 가방 위에 색과 단어, 일러스트를 그려낸다. 켈리 박은 그동안 수없이 ‘꿈(dream)’을 적거나 그렸다. 그는 지난해 9월 라흰갤러리에서 개최한 두 번째 개인전 로 한층 성숙한 작업을 선보였다. ‘아직, 계속해서, 여전히’를 뜻하며 완성되지 않은 작가 정신을 솔직하게 반영한 전시 제목과 달리 새로 선보인 작품에서 균형감이 느껴졌다. 주로 ‘획’의 작업을 하다 ‘면’의 작업인 ‘still’ ‘Sweat heart’ ‘Cheeeze’를 선보인 것.
입구로 들어서면 주방과 연결된 다이닝룸을 겸하는 거실이 나타난다. 거실 한쪽 면에는 가벽을 세운 뒤 직접 페인트칠해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창 앞에는 정사각형으로 타공한 벽면을 세워 창틀이 선반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 빌라는 구조가 특이하다. 전실과 가까운 작은 방문을 열고 들어서면 계단이 있는 형태. 작은 계단실은 식물 큐레이팅 브랜드 심다가 꾸민 식물과 반려견 감자의 장난감, 켈리 박의 큰 페인팅 작업으로 꾸몄다.
1인용 삶을 담은 프리랜서 작가의 공간
“최근작에서 캔버스 위에 제가 그린 ‘획’은 면으로 확장하면서 의미를 잃지요. 그게 무의미하다 해도 아름답다는 점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어요.” 그가 작업을 확장한 시점과 거처를 바꾼 때가 맞물렸다. 켈리는 지난 4월 경기도 광주 오포읍 신현리로 이사했다. 산을 깎아 만든 땅 위로 빌라가 빽빽이 들어섰지만 소란하지 않은 곳. 모두가 적요한 일상을 보내러 온 듯한 마을이었다. 한 빌라의 꼭대기 복층에 그의 새집이 있었다. 문을 열자 반려견 ‘감자’가 꼬리를 힘차게 흔들고 캉캉 짖으며 온몸으로 취재진을 반겼다. “안녕하세요, 아이고 감자야! 어서 들어오세요, 아이고 감자야!” 인사말 끝마다 감자가 붙었다. 반려동물이 삶으로 들어온 이후 직업은 전업 작가, 부업은 감자 엄마가 되었다는 것이 그의 근황. 활기 넘치는 감자를 따라 집으로 들어서자 따뜻한 분위기의 거실이 펼쳐졌다.
‘The Bag Project2020’ 을 작업 중인 켈리 박.
빌라 꼭대기층이라 덤으로 얻은 루프탑. 봄이 왔으니 이곳에 올라올 일이 더 많아질 것이다.
가의 공간을 직접 방문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취미와 습관뿐 아니라 작가의 개인적 기벽이나 인간적 속내까지 묻어나는 지점이 있기 때문. 예컨대 쿤데라는 소설을 치밀하게 구성하기 위해, 하루키는 소설 흐름에 강약을 주기위해 작업실에 좋은 스피커를 두고 음악을 즐겼으며 오원 장승업은 작업하는 방에 술독을 두고 붓을 쥐었다. 읽다만 책 한 권, 음료를 마시던 컵 하나, 흐르는 음악 하나하나는 작가를 말해주는 단서! 켈리 박의 공간은 프리츠 한센의 분홍색 세븐 체어, 카이저 이델이 디자인한 테이블 조명등, 작은 고가구가 기분 좋게 어우러져 있다. 좋은 향기 속에서 작업하기 위해 조 말론, 딥티크, 이솝처럼 공간에 향을 더하는 제품도 곳곳에 놓았다. “손잡이에 석고 방향제나 프레이그런스카드를 걸어두는 걸 좋아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고 나설 때 좋은 향을 맡으면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거든요.” 켈리 박은 1층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미팅 장소로도 요긴하게 사용한다. 애써 카페에 가는 대신 자신의 공간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 효과적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가장 많이 머물며, 타인을 초대하는 공간인 만큼 그는 이곳을 공 들여 취향대로 고쳤다. 벽면에 가벽을 세워 정사각형 창을 만들거나, 부드러운 핑크색으로 직접 도장한 것도 모두 공간에 대한 애정을 반영한다. “흰 타일 바닥에 대한 욕심을 떨칠 수가 없어서 어제는 견적을 한번 내봤어요. 여기 이 아일랜드 주방을 잘라버리고 일자로 만들면 어떨까요? 머릿속에서 계속 집을 재구성할 아이디어가 떠올라요.” 일주일에 한두 번, 집 안의 가구와 집기들을 이리저리 옮겨 새롭게 연출하며 기분을 환기하는 것도 취미다.
도시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꼬불꼬불 비탈 언덕을 올라야만 하는 곳에 새집을 마련한 까닭은 이런 소소한 행복을 되찾기 위해서다. “카페에서나 대중교통에서 날 위한 자리를 비집고 찾아 빠르게 변화에 익숙해져야 하는 삶은 피곤했어요. 1년에 한 번쯤 긴 시간 동안 여행하며 새로운 것을 마음에 담고, 저만의 조용한 공간으로 돌아와 보고 느낀 것을 풀어내며 사는 삶이 저에게 맞아요.” 예정대로라면 그는 지금 진행 중인 작업을 끝낸 후 독일 베를린에 있었을 터. 코로나19로 인해 계획을 취소했지만. “프리랜서로서의 삶에 좋은 면만 있는 건 아니지만, 어디서나 일하고 또 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경계를 제 노력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
집에서 삼시 세끼를 해결하는 날이 많은 그에게 아일랜드가 있는 ㄷ자 부엌은 살림의 8할을 해결하는 공간이다.
2층은 침실과 드레스룸 역할만 한다. 침대와 수납장만 배치했다.
작업과 생활의 집
일상생활과 작업 사이엔 얇은 슬라이딩 도어 하나만 있다. ‘집에서 일하기’는 출근이 없다는 게 장점이지만 퇴근 또한 없다는 게 단점 아니던가. 일과 삶이 이렇게 가까우면 불필요한 번뇌로 인한 피로감이 심하지 않을까? 그는 계획한 만큼의 작업을 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또 그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인간 박규리(본명)와 작가 켈리 박이 시소를 타는 듯 살지요. 그래도 이 집으로 이사 오면서 한 가지는 명확해진 것 같아요. 나의 일상이 균형을 찾을 때 비로소 작업도 안정적으로 성실하게 할 수 있더군요.”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은 저서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에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주체적 공간’을 놀이(spiel) 와 공간(raum)의 합성어인 ‘슈필라움’이라 표현한 적이 있다. 물리적 공간과 심리적 여유를 포함하는 슈필라움이 있을 때 인간으로서의 자존감과 매력, 품위를 지키며 삶에 유연하게 대처해나갈 수 있다고 했다. 켈리 박의 경우 반려견 감자와 함께 지내는 일상 공간을 슈필라움(놀이 공간)으로 두고, 작업실은 온전히 일하는 공간으로 두며 일과 삶을 공존케 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늦은 아침에 일어나 감자도, 저도 밥을 먹어요. 집 안을 청소하고 가볍게 산책 하고 돌아오면 오후 2시쯤 되지요. 그때부터 작업을 시작해 오후 6시엔 작업을 끝내요. 경우에 따라 한두 시간쯤 더 작업할 때도 있지만, 너무 늦은 시간까진 하지 않으려 해요.” 켈리 박은 이렇게 규칙적인 일상을 보내야만 작업에 대한 에너지를 계속 발산하고, 일상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작업실 벽면에는 드로잉 작업을 위한 스케치와 그가 좋아하는 단어를 나열한 메모가 붙어 있다.
현관 거울을 통해 보이는 계단실 일부. 그가 드로잉 작업한 아르텍의 60체어와 키보드를 두었다. 아르텍 60은 스툴 또는 협탁으로 쓸 수 있어 활용도 높은데다가 디자인이 간결해 그가 가장 좋아하는 가구 중 하나다.
집에서 답답함을 느끼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2층에 있는 또 하나의 놀이 공간 때문이다. 침실이 있는 2층에는 뒷산 풍경이 그대로 보이는 넓은 테라스가 있다. 산책을 나가지 못하는 날에는 이곳에서 감자와 시간을 보내며 충분히 휴식한다. 요즘 켈리 박은 한동안 작업을 하지 않은 ‘The Bag Project’를 다시 시작했다. 새로운 공간에서 정돈된 마음으로. 켈리 박이 작업하는 동안 반려견 감자는 발치에 앉아 쌔근쌔근 잠을 잔다. 해가 지면 박규리는 작업실 문을 닫고 부엌으로 가 밥을 해 먹은 뒤 음악을 듣다 잠자리에 들 것이다. 일과 삶 사이에서, 내일 만날 어떤 이의 사연을 기대하며.
“작가로서의 호기심, 새로운 작업에 대한 동력은 일과 삶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며 공존하는 가운데 깊어지는 것 같아요.” 새로운 공간에서 삶의 새 면을 만난 작가의 ‘업글인간’ 라이프는 작업과 생활 속에서 계속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