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강연의 새로운 모델 <세바시>. 15년 동안 지속된 4천 편의 ‘15분 강연’은 누군가에게는 미래 전망을, 누군가에게는 위로를, 누군가에게는 삶의 의미를 전했다. <세바시>를 만들고 키워온 구범준 대표PD에게 물었다. AI 시대, 그 평범하고도 위대한 사람들의 ‘삶의 고백’은 여전히 유효한가.

2017년 독립 법인이 된 ㈜세상을바꾸는시간15분은 CBS 소속이 아니지만, CBS도 지분을 나눠 갖고 있다. 사무실도 양천구 목동의 CBS 본사 건물에 위치한다. 이 장소는 ‘세바시45’를 녹화하는 스튜디오다. 세바시45는 <세바시> 강연 중 조회 수가 높거나 구독자들이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할 때 강연자를 다시 초대해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인터뷰다.
“나는 ‘막’을 인간에게 남은 가장 창조적인 힘이라 믿는다. 그것은 무질서가 아니라, 익숙한 정의를 지우고 새로운 가능성을 세우는 태도다. 세바시 무대에서 내가 보아온 연사들의 눈빛도 결국 이 ‘막’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완벽한 답보다 낯선 시선으로 세상을 다시 정의하려는 용기,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AI 시대에도 잃지 말아야 할 능력이다. 그러니 이제 당신도 스스로 물어야 할 때이다. ‘나는 무엇을 막 하고 싶은가?’” _ ‘막’ 기고문 중
저리도 진달래는 진달래이며 개나리는 개나리다. 그처럼 사람은 사람이다. 모름지기 인간의 모든 종교와 철학의 시원은 사람의 ‘사람다움’을 찾아내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저 유서 깊은 ‘정체성 여행’은 AI 시대라는 격랑을 헤쳐가는 중이다. 나는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이하 <세바시>)이라는, 자칭 타칭 ‘온라인 인생학교’의 대표에게 이런 시대를 사는 사람의 ‘사람다움’에 대해 물을 참이다.
그런데 <세바시>가 무엇인가. 이제 그냥 “세바시요” 하면 아하, 고개를 끄덕일 이름 아니던가. ‘TED 형식의 한국형 미니 프레젠테이션 강연 프로그램’ ‘강연회와 방송이 함께 하는 온·오프라인 결합 프로그램’ 같은 풀이 글도 크게 필요 없어 보인다. 2011년 5월에 시작했으니 올해로 15년 차다. 연사 1천6백여 명이 4천 개 이상의 인생 이야기를 세상에 전달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구범준의 <세바시>’처럼 그와 그 브랜드를 동일시한다.
“처음 기획할 때 저에게 던진 질문이 있어요. ‘왜 이 일을 하는가’. 저는 그걸 ‘업의 욕구’라고 말하는데, 이 업을 통해 내 안의 어떤 욕구를 실현할 것인가를 물었죠.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 많은 사람이 보게 하고, 그들의 삶과 공동체의 변화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라는 답이 나왔고요. 그때가 2010년 겨울이었고, 이듬해 봄에 <세바시>를 시작했어요.” 이건 요즘 같은 세상에 홍익인간, 재세이화在世理化만큼 보기 드문 말이다. 한참 곱씹게 만든다.

〈세바시〉는 2011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오프라인 강연회를 ‘자발적 관객’과 함께 공개 녹화한 후 유튜브 등 채널에 공개하는 형식을 취했다. ‘공개 강연회’의 체감 지수가 〈세바시〉의 성공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이 사람의 이력을 더투어야겠다. 그는 오랫동안 그림을 그렸다. 여섯 살부터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미술 영재 소리 들으며 살았다. 그러다 “졸업해서 뭐 먹고사나” 하는 자각에, 그리고 “사회의 다양한 이야기를 폭넓게 배울 수 있다”는 형(구범진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의 조언에 미술대학 대신 연세대학교 사회학과에 들어갔다. 텍스트, 논쟁, 논리를 벼린 사회학도는 졸업 후 CBS 21기 PD가 됐다. 시사 교양 라디오 프로그램을 연출하다 2011년 <세바시>라는 뉴미디어를 기획해냈다. ‘어떻게 하면 영향력 있는 콘텐츠를 만들어서 행사할 수 있을까’라는 두 번째 ‘업의 욕구’ 덕이었다. 당시는 페이스북, 유튜브 같은 뉴미디어가 사용자를 조금씩 모아가던 때로, 레거시 방송사들조차 온라인 콘텐츠를 단순 재방송 플랫폼으로만 활용하고 있었다. “오프라인에서 공개 녹화한 콘텐츠를 유튜브, 페이스북 같은 온라인 채널에 올리는 하이브리드 모델로 전문 편성 채널 CBS의 낮은 접근성을 우회해보자”는 그의 승부수는 통했다. <세바시>는 가장 먼저 디지털을 선점한 강연 플랫폼이 되었고, 2017년 회사를 분리하면서 그는 (주)세상을바꾸는시간15분의 CEO가 되었다. 지금 <세바시>는 구독자 2백17만명을 자랑하는 독보적 콘텐츠 플랫폼이다.
〈세바시〉는 답이 아니다, 질문이다
감 좋은 이는 벌써 알아챘을 테지만 그에게는, 그리고 <세바시>에는 계속 ‘질문’이 있었다. “보통 강연은 답이라는 게 상식인데, 10주년 때 곰곰이 생각해보니 강연이 답일 리 없겠더라고요. 답이라면 그대로 하면 다 풀려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안 그렇죠. 그건 그 사람의 인생이지 내 인생, 내 이야기는 아니니까. 강연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네, 내 인생에 던지는 질문이네, 싶었죠. 그런데요, 저는 <세바시>를 강의라고 하지 않고, 이야기라고 해요. 1천6백여 명의 강연자가 자신이 경험하고 생각하고 배운 것을 재료로 타인과 세상에 전하는 의미, 메시지니까요.”
자기 삶의 어젠다를 세상에 전한 연사 1천6백여 명은 유명 인사부터 평범한 이웃까지 다양하다. <세바시> 강연으로 ‘이국종 지원법’으로 일컫는 권역외상센터 지원법 발의의 계기가 된 이국종 교수, 소방관의 국가직 전환 여론을 이끈 정은애 119안전센터장, ‘지구기후팬클럽 어셈블’의 창단 멤버가 된 18세 소녀, 아토피 전쟁 블로그 운영자, 자살 예방 전문 강사…. 평범하고도 위대한 그 삶의 이야기들은 달마의 7년 면벽이나 큰스님의 장좌불와가 무색할 정도다. 유리 상자 속 솜사탕 빨기처럼 남의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환약의 떫고 쓴맛을 다 맛본 사람의 ‘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초월자가 내려주는 동아줄이 아니라, 깨지고 실패하고 성장해본 사람들이 서로를 받아주는 ‘사람 그물’이 되어 말 그대로 ‘세상을 바꾸’고 있다.

이국종 교수는 〈세바시〉에서 “한 생명을 향한 진심은 결국 나를 다시 묻는 질문”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진짜 세다는 건 귀에 딱지가 앉아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 것입니다.”(래퍼 치타). “불안을 에너지로 쓰는 사람이 있고, 불안에서 고통만 느끼는 사람이 있죠. 불안한 시대에는 계속 만만한 것으로 쪼개서 하나씩 조져야 합니다.”(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김경일 교수), “아이가 부모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과연 나를 선택했을까? 이 질문만 스스로에게 던져요. 그러면 육아 전쟁을 치르더라도 좀 어른답게 치르지 않을까요?”(부모교육 전문가 임영주), “남들은 다 해내는 그 일을 나는 왜 못 할까? 이런 느낌이 확 든다면 여러분 안에 ‘등신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 등신等神은 신과 같은 존재라는 뜻이었으니까 우리 모두 그 의미를 되찾아보자고요.”(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학과 이호선 교수)
마음을 읽는 감각
“<세바시>를 만들며 제가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던진 질문이 있어요. ‘너는 어떤 사람이야? 너는 어떤 삶의 태도를 지닌 사람이야?’ 우리는 질문보다 답을 하는 훈련을 더 많이 한 사람들이에요. 자신에게는 더더욱 질문하지 않아요. 문제 상황이죠. 내 마음을 모르는데,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 문제 상황. 안다고 해도 표현을 못 해. 애가 너무 늦게 들어왔어. 그러면 대부분 등짝을 팍 때리죠. 마음의 구체적인 팩트는 걱정이나 불안 같은 건데, 태도는 폭력으로 내보이는 거지. 이건 마음과 태도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어떻게 행동하고 살 것인가를 우리는 태도라고 불러요. 태도는 행동이고, 행동은 감정(마음)에서 비롯돼요. 그 시작은 자신의 마음 읽기이고요. 15년간 <세바시>를 만들며 마음 읽기는 인간에게 추가로 필요한 또 하나의 감각이라는 것, 그리고 얼마든지 훈련 가능한 능력이라는 것을 수많은 인생 이야기를 통해 알았어요. 내가 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삶의 선택이 달라지고, 삶의 태도가 또렷해진다는 것도요.”
<세바시> 15주년을 기념하며 펴낸 책 <마음을 읽는 감각>은 그가 들으며 스스로 조금이라도 변화를 경험한 이야기들의 큐레이션이다. 챕터마다 빼곡한 ‘구 피디의 세바시 플레이리스트’에 각 이야기의 QR코드가 우수리처럼 따라붙었다. ‘완벽주의와 번아웃을 지나온 세바시 PD의 인생 수업 노트’라는 설명도 딸려 있다. “아내가 그러데요, ‘지 와이프 마음도 모르는 주제에 무슨?’. 그래서 제가 싹 정리했어요. ‘네 마음 아니라 내 마음’을 읽는 감각이라고. 재난 사고 때 승무원의 제1 원칙이 ‘나부터 산소 마스크를 낀다, 나부터 산다’라잖아요. 그게 한 명이라도 더 살리는 승무원의 의무라잖아요. 세상을 구하고 바꾸려면 나부터 사랑하고, 공감해줘야 하는 거죠.”

“〈세바시〉 앞에 생략된 말은 ‘너의’입니다. 너의 세상을 바꾸라는 말이죠. 아무리 세상이 비관적으로 보여도 세상은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이 그 바탕에 있어요.”
‘깨달음’마저도 특정 소수만이 지닌 배타적 유전자 정보가 아닐까 의심하는 우리에게 이 책은 “사람을 바꾸는 답은 언제나 스스로 던진 질문에 스스로 답해보는 과정에서 나온다”며, “네 마음을 읽어보라”며 부추긴다. 퇴근길에 무심코 하늘을 올려보다 ‘이렇게 살다 갈 수 없지 않은가’라는 자각이 울컥 치민다면 QR로 열리는 강연 영상을 보고, 그가 큐레이션한 강연자들의 빛과 소금 같은 이야기를 좀 읽어보라 권한다.
“<세바시>의 가치는 아카이브에 있어요. 어떤 분야에서 10년, 15년 이상 자기 스토리와 자기 업의 영역을 일군 사람들이 진짜 정성껏 준비해서 몇백 명 대중 앞에 서서 말하는 거니까 그만큼 사유하고 절차탁마하지 않겠어요? 그걸 3천 편, 4천 편 넘게 보유한 ‘휴먼 라이브러리’가 <세바시>예요. 기록사적으로도 가치를 지닐 것 같아요. 제가 늘 안타까운 거는 우리 사회의 어떤 큰 인물들, 스승들이 <세바시> 안 하고 돌아가신 거예요. 강의는 복제 가능하지만, 이야기는 복제 불가능하니까요. AI는 ‘나의 이야기’를 못 만들어요. ‘How’에는 답하지만 ‘Why’에는 답하지 못하고요. 이제부터는 ‘나는’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쓰는 자가 승리할 거예요. AI 시대에도 대체 불가능할 거고요. 그래서 더더욱 사람들이 ‘나의 이야기’를 찾아야 하죠.”
1천 개의 강에 비치는 달처럼 집집마다 사람마다 천하를 비추는 유사 전지전능자 AI에게 더 이상 쫄 일이 아니라고, ‘AI 네이티브’를 자처하는 자식 앞에서 매번 구겨진 깻잎장아찌 같은 얼굴을 할 염려는 없다고 그가 다독인다. 관계·마음·태도처럼 변하지 않는 것을 가르치면 변하는 것은 금방 적응한다고, 우리가 진짜 가르쳐야 할 것은 인간의 레거시라고 말이다.

〈세바시〉 휴먼 라이브러리 중 마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구범준 PD의 눈으로 큐레이션한 책이 〈마음을 읽는 감각〉이다. ‘자기 성장’ ‘소셜 이슈’ 편도 차례차례 펴낼 계획이다.
나는 무엇을 ‘막’ 하고 싶을까?
“대부분의 강의 프로그램은 강사 중심, 화면에 띄우는 장표 중심이거든요. 근데 <세바시>는 강연에 대한 리액션을 넣으려고 처음 시작할 때부터 공개 녹화를 했어요. 리액션 때문에 공개 녹화하겠다니까 처음엔 다들 미친놈이라고 했어요. 그 넓은 4백 석짜리 콘서트홀을 빌리는 비용만 해도 얼마야? 그런데 말이죠, 강연자가 A=B라는 통찰을 제시했는데, 이게 긴가민가할 때 ‘와!’ 하는 사람의 표정을 넣어버리면 ‘그렇구나’로 유도돼요. 깔깔대는 사람의 표정을 넣으면 웃어도 될까 망설이던 사람까지 웃고요. 그때만 해도 찾아볼 수 없던 15분짜리 프로그램으로 만들어버린 것도 저만의 ‘막’ 정신이었다고 할까요? 온·오프라인 하이브리드 모델을 시도한 것도 그렇죠. 기존에 사용하던 방식을 뒤집어버리는 것, 아무도 쳐다보지 않은 방향으로 한번 쳐다보는 것, 저만의 반전이었죠. 지금 같은 전환기의 해답도 ‘막’에 있다고 생각해요. 경계를 지우고,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가능성을 과감히 시도하는 힘 말이죠.”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다. 알지 못함은 새로운 것 중 으뜸 새로움이다. 시대의 격랑 앞에서 아무것도 모르겠는 우리에게 그가 건네는 질문은 “무엇을 ‘막’ 하고 싶은가?”다. 마지막으로 인지과학자 김상균 교수가 <세바시>에서 건넨 이야기를 전한다. “최적화는 AI에게 맡겨두세요. 그리고 우리 모두가 삽질을 열심히 하면 좋겠습니다. 그걸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사랑하고 별같이 빛나는 존재로 남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