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모래 씨가 사는 ㄷ자 형태의 12평 한옥은 지상과 지하 두 개 층으로 나누어져있다. 안방으로 사용 중인 공간은 물건을 최소한으로 배치해 검박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집주인 김모래 씨는 학업을 위해 유학 중이던 부모 밑에서 자랐다. 독일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보다 서구의 생활양식을 먼저 접했다. 그런 그가 경기도 남양주 한옥과 연을 맺은 건 열세 살, 6학년이 되던 해였다. “학위를 마친 부모님을 따라 한국에 돌아왔어요. 그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그곳에서 생활했지요. 지금의 도시 한옥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에요. 70년이 넘은 초가로 지은 집이거든요.”

김모래 씨의 한옥에는 장독대가 있다. 그 위에 올라서면 기와지붕과 드넓은 하늘이 모습을 드러낸다.
양옥 생활에서 하루아침에 한옥살이를 하게 된 모래 씨. 환경의 변화는 낯설고도 불편함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을 터. 하지만 그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독일에 살 때는 연립주택에서 생활했는데, 한국에 오니 우리 가족만을 위한 단독주택에 살 수 있게 된 거예요. 신나더라고요.” 얼마나 좋았는지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갈 시간만 되면 해사한 미소를 띠었다. 하루는 그에게 담임선생님이 물었다. 집에 가면 뭐가 좋길래 그렇게 늘 밝은 표정을 짓냐고. “그 질문에 햇빛이라고 대답했대요. 집에 가면 햇빛이 있어서 참 좋다고.” 성인이 된 모래 씨의 머릿속에 그 기억은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방과 후 가방을 벗어 던지고 대청에 누워 빛을 한 아름 안았을 때의 포근한 감각은 몸 어딘가에 꿈틀대고 있었다.

우연히 찾은 가회동 한옥의 문을 연 순간, 두 개 층으로 쌓아 올린 장독대를 본 순간을 잊지 못한 모래 씨. 하여 자신만의 장독대를 새로 지었다. 건물 뒤로 돌아가면 물치에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가 있다.
생애 첫 독립을 앞두고 집을 보러 다닐 때 그가 품에 안고 있던 단어도 바로 빛이었다. 유년 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지낸 남양주 본가의 기억.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풀 내음. 자연과 이웃하며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지나는 나날의 기억. 도시 한옥을 보금자리의 1순위로 생각한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직장과 가까운 계동부터 가회동에 이르기까지 골목이란 골목은 샅샅이 살피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한옥에 다다랐다. 12평 정도 되는 규모에 꽤 허름한 집이었다. 빗물이 잘 빠지지 않아 벽면에는 곰팡이가 슬어 있는가 하면, 건물 기둥도 썩어 바스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보통이라면 막막함과 거부감을 느껴도 무방할 법한 상태. 그런데 모래 씨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부모님이 남양주 한옥을 하나하나 걷어내고 고쳐가며 집의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만드는 모습을 봤잖아요. 그래서였을까요? 다소 낡고 허름했지만 잠재력이 있다고 느꼈어요. ‘아, 여기는 이렇게 고쳐볼 수 있겠다, 저건 걷어내면 되겠다’ 이런 가능성이 보인 거죠.” 수선하는 부모의 모습과 모양새를 갖춰가던 남양주 본가의 모습이 가회동 한옥 위에 포개졌다. 집을 보고 ‘안쓰럽다’는 감정을 느낀 모래 씨는 자신의 감각으로 이곳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고 싶었다.

안방과 거실 사이에는 들어열개문을 설치해 필요시 공간을 보다 넓고 개방감 있게 활용하도록 했다.
그러자 처음 이 집에 도착했을 때 본 장독대가 다시금 눈에 들었다. “2층으로 된 장독대가 있었어요. 모양도 독특하고, 위에는 뭐가 있을지 궁금해 저도 모르게 올라가봤죠.” 고개를 들자 눈앞에는 주변 한옥의 기와지붕이 마치 드넓은 바다처럼 넘실거리는 모습이 펼쳐졌다. 그 모습을 한참 보다가 멀리 있는 남산으로 시선을 옮기던 중 어딘지 포근함을 느꼈다. “하늘이 다 제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햇살이 어깨 위로 흘러내려 살결까지 환해지는 기분이었죠.”

장독대이자 또 하나의 마당으로 쓰는 흰 건물 내부에는 지상과 지하를 이어주는 통로를 마련했다.

장독대이자 또 하나의 마당으로 쓰는 흰 건물 내부에는 지상과 지하를 이어주는 통로를 마련했다.
장독대, 마당이 되고 통로가 되다
장독대, 정확히는 장독대에 올라 끌어안을 수 있는 햇빛과 북촌의 풍경을 원한다는 모래 씨의 말에 건축사사무소 선재의 차선주 소장은 설계만큼 꼼꼼한 자료 조사를 통해 심의를 준비했다. “서울시의 지원을 받는 과정에서 한옥의 형태는 갑론을박의 주제 중 하나예요. 한옥 안에 장독대를 넣겠다고 했을 때 설득하기가 쉽지 않았죠. 장독대가 있는 한옥은 보지 못했다는 의견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장독대는 일제강점기 건설업자 정세권의 도시계획에 의한 필지 분할과 이에 따른 중소형 도시 한옥의 등장으로 인한 시대의 흔적이었다. 당시 생활공간의 확장에 따라 협소해진 한옥에 물치, 장독대 위 공간은 근대 한옥의 마당 역할을 톡톡히 하는 건축 요소였다. 결국 세 번의 심의 끝에 건축주가 원하는 장독대를 새롭게 재해석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독일에서 생활하던 부모가 가져온 앤티크 함. 그 아래에 덧댄 수납함은 모래 씨가 직접 짜 맞췄다. 유럽과 한국 생활이라는 두 개의 자아를 은유하는 듯 보인다.
물론 그는 장독대 형태의 재현보다는 지금 이 집에 필요한 요소로서 장독대를 활용하고자 했다. 차선주 소장이 고안한 건 지상과 지하를 이어주는 통로였다. 외부는 장독대로 활용하고, 내부는 지상과 지하를 연결하는 계단을 삽입한 것. 그는 나무와 콘크리트라는 재료의 조화를 통해 한옥과 지하를 이어주는 통로이자 경치를 만끽할 수 있는 이곳만의 물치를 만들었다. 지상층은 개방감을 확보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평상시에는 침실과 거실, 주방의 문을 닫아놓되 손님이 오거나 공간을 넓게 쓸 경우를 위해 들어열개문을 설치했다. 침실과 거실 사이에는 불발기창을 달아 전통 한옥 분위기를 살렸다.
계단을 따라 자리한 지하 공간의 경우, 마당과 대청의 단차로 생긴 천장의 굴곡을 적극 활용했다. “보통 한옥에서 지하의 천장을 일자로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부분만큼은 꼭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건축가가 고집한 단차는 자칫 답답할 수 있는 지하 공간에 볼륨감을 부여했다. 또한 높낮이 차로 생긴 여백에는 고창高窓을 달아 모래 씨가 좋아하는 빛이 지하에도 스며들게끔 활용했다.

천장의 높낮이 차이로 인한 구조감이 돋보이는 지하 공간. 모래 씨의 서재이자 작업 공간 겸 손님맞이 방으로 활용 중이다.
한옥은 주인을 닮아간다
한창 집 얘기를 하던 차선주 소장이 이 얘기는 꼭 해야 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1층 부엌 바닥에 지하 방과 이어지는 통로가 있어요. 모래 씨가 자기만의 비밀 장소처럼 만들어달라며 요청했죠.” 인생의 절반, 집을 짓고 건축주의 면면을 봐온 그는 가회동 한옥이 유독 주인을 닮은 집이라 덧붙였다. “원하는 바가 분명한 건축주의 집은 어떻게든 주인을 닮게 돼요. 모래 씨가 차분하면서 은근 장난스럽고 천진한 면이 있거든요. 그 성향이 집에 고스란히 묻어 있어요.”

건축사사무소 선재는 시간이 지날수록 집이 더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장면을 만들고자 국내산 소나무로 집을 지었다.
모래 씨도 비슷한 말을 했다. “1층에서 생활할 땐 뭐랄까, 매사 조심하려고 노력해요. 관리도 꼼꼼하게 하고, 물건도 가급적 수납장에 넣어놓고 지내고요. 평소 차분한 제 성향처럼 말이죠. 그런데 때론 저도 틀이나 양식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그럴 땐 지하로 내려가거나 장독대에 올라요. 그러곤 어린 시절 자유분방한 모습을 드러내요. 그런 점에서 이 집이 여러 자아를 가진 제 모습을 고스란히 닮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