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함께 한옥에 머물며 한국 고미술과 자신의 작품이 대화하는 전시를 선보인 파스텔의 마법사 니콜라스 파티.
벽화 ‘나무 기둥’과 초상화 ‘버섯이 있는 초상’이 전시된 전시실 아치에 기대선 니콜라스 파티.
흙에서 태어난 인간은 흙으로 돌아간다. 서양식으로 말한다면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Ashes to ashes, dust to dust)”. 무위자연에서 탄생한 모든 것이 열매를 맺는 것은 한 시절, 이내 대지의 품으로 무르녹는다. 고대부터 근현대까지의 미술사 속 다양한 작가, 모티프, 양식, 재료 등을 참조하고 샘플링하는 니콜라스 파티Nicolas Party의 인기가 이토록 뜨거운 것은 모든 존재가 직면하는 이런 실존적 고민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리라(니콜라스 파티는 유수 아트 페어에서 수많은 컬렉터를 오픈런하게 만드는 작가다. 최근 성황리에 막을 내린 제3회 프리즈 서울에서도 그의 작품 ‘커튼이 있는 초상화(Portrait with Curtains)’가 2백50만 달러, 한화로 약 33억 5천만 원에 팔렸다). 과거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문화적 상징을 언젠가 먼지로 사라질 지극히 연약한 재료인 파스텔로 구현하는 그의 작품은 인간, 문명, 자연의 지속과 소멸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니콜라스 파티, ‘복숭아가 있는 초상’, 리넨에 소프트 파스텔, 150x109.9cm, 2024, 작가 및 하우저앤워스 제공. ©니콜라스 파티, 사진 Adam Reich.
작자 미상, ‘십장생도 10곡병’, 비단·채색, 210×552.3cm, 18세기 후반 조선, 개인 소장.
한국 고미술과의 만남
지난 8월 31일 호암미술관에서 스위스 출신 아티스트 니콜라스 파티의 개인전 <더스트Dust>가 개막했다. 기존 회화 및 조각 마흔여덟 점, 신작 회화 스무 점, 전시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대형 파스텔 벽화 다섯 점을 선보이는 작가의 최대 규모 서베이전이자 호암미술관의 첫 동시대 작가 개인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특별한 점은 리움 소장품을 포함한 여러 고미술품과 그의 작품이 어우러지는 동서고금을 잇는 전시라는 것. “궁극적으로 저의 작품과 한국의 고미술 작품 간의 대화가 이뤄지길 바랐어요. 그래서 함께 선보일 고미술 작품을 선정하기 위해 리움미술관의 수장고도 꼼꼼히 둘러보고 전시를 기획한 곽준영 전시기획실장과 많은 대화를 나눴죠. 아무래도 저는 한국 고미술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미지적으로 마음에 드는 작품을 고르면 곽준영 전시기획실장이 상징성과 전시 맥락을 고려해 어떤 것이 더 적합한지 설명해주고 이를 참고했죠. 예를 들어 저는 처음에 달항아리를 제안했지만 논의한 끝에 ‘동굴’ 벽화 앞에 백자 태호를 전시하기로 결정한 것처럼요.”
어머니의 자궁과 생명의 기원을 상징하는 동시에 세상을 떠난 이를 묻는 장소이기도 한 동굴. 왕실 자손의 탯줄을 소중히 담아두던 백자 태호를 품은 ‘동굴’ 벽화 앞에서 우리는 생의 순환을 상기한다. 이처럼 18세기 조선 시대에 제작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이상적 관점을 보여주는 ‘십장생도 10곡병’과 사계절 풍경화를 한자리에 전시하거나 상상의 존재인 ‘공룡’ 연작과 용 두 마리가 목을 구부린 채 얼굴을 마주 보는 ‘청동운룡문 운판’을 병치하는 등 약 열 개로 나눈 각 전시 공간에서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는 작품 간의 대화가 이뤄진다. “한국의 여러 고미술을 탐구하고 공부하며 특히 흥미로웠던 작품은 ‘십장생도 10곡병’이었어요. 그림 속 사슴, 복숭아 등 각 요소가 지닌 상징성이 인상 깊었죠. 저 역시 작업할 때 나무 하나조차 그 이면에 담긴 역사적 맥락과 의미를 고려해 그려 넣을 정도로 상징성을 중요하게 여기거든요.” 니콜라스 파티는 단순히 자신의 작품과 고미술품을 병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장수를 상징하는 열 가지 소재의 조화로운 모습을 상상하며 그린 ‘십장생도 10곡병’, 김홍도의 ‘군선도’ 속 여러 모티프를 참조해 상상 속 팔선八仙(중국에 전해오는 여덟 명의 신선) 초상화로 재현하기도 했다.
벽화 ‘동굴’과 백자 태호가 어우러진 전시 공간 전경. 사진 김상태, 호암미술관 제공.
먼지처럼 흐려지고, 뚜렷해지는
<행복> 취재팀이 니콜라스 파티와 첫인사를 나눈 장소는 그가 자신의 아내 사라Sarah, 그리고 이제 두 돌을 맞이하는 딸 스완Swan과 머물고 있는 누하동의 한옥 스테이 클래식고택 서촌이었다. 앞서 말했듯 이번 전시에서 거대한 벽화를 다섯 점이나 선보였고, 작가는 작업을 위해 6주간 한국에 머물렀다. “글로벌 브랜드 호텔에 묵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그리하면 뉴욕에 있는 동일한 브랜드 호텔에서 지내는 것과 다를 것이 뭐가 있겠나 싶어 한옥 스테이를 선택했어요.” 영화 <건축학개론> 속 주인공들이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약속하는 장면의 촬영지이기도 한 클래식고택 서촌은 두 개의 방과 거실, 다락, 정원이 있는 독채형 한옥 스테이다. 숙박은 물론 한국 영화와 클래식 음악 등을 주제로 꾸준히 고택음악회를 개최하는 복합 문화 공간이기도 하다. “스완이 마당의 검은 돌을 참 좋아해요. 야외 욕조에서 목욕할 때도 즐거워하고요. 지난주엔 제주도에 함께 다녀왔죠. 김치 같은 매운 음식도 잘 먹는답니다.(웃음)”
사실 그가 한국에서 머무를 장소로 한옥 스테이를 선택한 것은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단순히 해외에서 온 아티스트란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컬러로 물든 벽, 유럽 중세 건축을 연상케 하는 아치와 긴 회랑까지. <더스트>를 비롯해 니콜라스 파티의 개인전을 한 번이라도 관람한 적 있다면 그가 공간의 힘을 제대로 이해하고,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작가란 걸 눈치챘을 것이다.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에서 프레스코화를 감상한 적이 있어요. 우리가 흔히 보는 미술관이 아닌, 프레스코화가 실제 그려진 시기와 비슷한 시대에 지은 건물 안에서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었죠. 전시 공간에 아치를 적용하기 시작한 건 5~6년 전쯤부터예요. 물론 제 벽화는 일시적이지만요.”
‘구름’ 벽화와 ‘부엉이가 있는 초상’이 어우러진 전시 전경. 사진 김상태, 호암미술관 제공.
니콜라스 파티, ‘폭포’, 벽에 소프트 파스텔, 546x389cm, 2024, 작가 제공. ©니콜라스 파티, 사진 김상태.
니콜라스 파티는 자신의 파스텔화를 ‘먼지로 이루어진 가면(Mask of Dust)’에 자주 비유한다(이번 전시명도 여기서 유래했다). 먼지는 살랑 불어오는 바람에도 훅 날아가버린다. 그러나 끝없이 생겨나는 것 또한 먼지가 아니던가.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듣고 ‘아, 이 음악은 낡았어’라고 느끼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지금까지도 죽음에 대한 인간의 공포를 생생하게 전하죠.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도 마찬가지예요.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깊은 슬픔, 인간이 지닌 근원적 감정을 담아내죠. 그리고 이런 것은 아무리 시대가 급변하더라도 사라지지 않아요. 이를 보여주는 것이 예술이고요. 지금 제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은 5년 뒤에 사라질 수도 있지만 예술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와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눠요.” 호암미술관의 벽에 짓이겨진 파스텔 가루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공중으로 흩어진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매 순간 더욱 선명해지고 있다.
한옥 스테이 클래식고택 서촌에서 만난 니콜라스 파티와 그의 아내 사라, 그리고 딸 스완.
<니콜라스 파티: 더스트>
기간 2025년 1월 19일까지
장소 호암미술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에버랜드로562번길 38)
관람료 성인 기준 1만 4천 원
문의 031-320-1801~2